인사이트/책 2015. 1. 26. 01:15

[책] 정재승+진중권, 크로스 2





<발췌>

1. 로또

     랜덤워크 random walk : 수학, 컴퓨터 과학, 물리학 분야에서 임의 방향으로 향하는 연속적인 걸음을 나타내는 개념이다. 일례로, 액체나 기체 속에서 움직이는 분자의 추적 경로

     범주 오류 category mistake : 논리적으로 다른 범주에 속하는 말들을 같은 범주에 속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오류로 영국의 분석철학자인 라일이 처음 사용한 말이다. 예를 들면, 옥스퍼드를 방문한 사람이 여러 단과대학 college, 도서관, 경기장, 박물관 등을 구경하고 나서 “그런데 대학교 university는 어디 있죠?”라고 묻는 경우 그 사람은 범주오류를 범한 셈이 된다. 왜냐하면 ‘대학교’는 그 사람이 구경한 여러 가지 기관들이 조직되어 있는 전체를 말하는 것으로, 단과대학, 도서관 등과 병치되는 기관이 아니라 이것들을 포함하는 상위 개념이기 때문이다.

     초기 컴퓨터 예술은 마르코프 체인 (시간에 따른 시스템 상태의 변화. 매 시간마다 시스템은 상태를 바꾸거나 같은 상태를 유지한다)과 몬테카르로 법(물리적, 수학적 시스템의 행동을 시뮬레이션 하기 위한 계산 알고리즘, 통계학적이고, 일반적으로 무작위의 숫자를 사용한 비결정적인 방법) 을 사용했다. 먼저 마르코프 체인을 이용해 인간이 만든 음악에서 음렬의 속박 확률을 구한 뒤 몬테카를로 법으로 얻어진 확률분포에 따라 새로운 음렬을 생성해내는 식이다. 이 경우 컴퓨터가 생성한 음악은 확률분포의 동일성을 통해 인간이 만든 음악에 어느 정도 근접하게 된다. 당첨번호를 생성하는 방법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문제는, 인간의 음악작품은 ‘정보’를 가진 구조물 neg-entropy인 반면, 로또의 당첨번호는 애초에 ‘정보’가 없는 entropy 수열에 불과하다는 데 있다. 로또의 당첨정보는 ‘정보’가 아니다. 당첨번호 속에서 각 숫자의 발생 확률에 차이가 나는 것은 일시적 현상일 뿐, 추첨이 반복적으로 이루어질수록 그 차이는 점점 사라져갈 것이다. 엔트로피 증가에 의한 당첨번호의 열사



2. 오디션 _ 경쟁사회의 공포조차 오락의 대상으로

     네덜란드 역사가 하위징아가 지적하듯이 인간에게는 ‘유희 본능’이 있다. 그리하여 굳이 삶이 강요하지 않아도 인간들은 무료함을 쫓으려고 경쟁을 즐기곤 한다. 물론 ‘놀이’로 행해지는 이 경쟁은 진짜가 아니라 허구에 불과하다. 허구라 해서 진지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남미의 어느 두 나라는 놀이를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여 축구경기가 끝난 뒤 서로 전쟁을 벌였다. 반면 놀이를 너무 하릴없이 받아들이면 아예 재미가 없어진다. 놀이의 진정한 적은 상대가 아니라 ‘쓸데없다’는 말로 ‘놀이의 분위기를 깨는자 Spielverderber’다.

     오늘날 ‘놀이’는 차고 넘친다. 오락들의 경쟁 속에서 살아남으려면 놀이의 몰입도를, 말하자면 놀이에 동반되는 진지함과 긴장감의 수준을 높여야 한다. 놀이는 현실에 가까울수록 진지해진다. 수많은 놀이에 익숙해져 웬만한 놀이에 만족하지 못하는 대중을 만족시키려면 놀이를 가능한 한, 현실에 가깝게 가져가야 한다. 오디션이라는 게임은 이 필요성에서 탄생했을 것이다. 다른 게임과 달리 오디션은 현실과 허구가 구별되지 않는 지점에 서 있다. 그 안에서는 현실과 똑같이 경쟁이 일어난다.

미디어 이론의 관점에서 보면 오디션프로그램은 올드미디어가 뉴미디어를 재매개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치열한 경쟁 속에 살아남는것이 컴퓨터 게임에서 즐겨 사용되는 서사 중 하나라면 오디션은 대중에게 익숙한 이 오락의 문법을 방송에서 차용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따라서 그것은 현실과 허구의 존재론적 융합이자, 동시에 방송과 게임이라는 매체의 융합이기도 하다. 이 이중의 융합을 통해 오디션은 경쟁사회의 심리적 압박, 그 스트레스를 오락으로 바꾸어 향유의 대상으로 제공한다.

고대 그리스. 고대 인들은 현실과 허구를 그렇게 분명하게 구별하지 못했다고 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연민은 그저 주인공이 불쌍하다는 수준을 넘어 그의 운명이 곧 내 것이 될 수 있다는 느낌에 가까웠다. 그가 말한 공포 역시 영화를 보는 우리의 것보다 훨씬 강력해 거의 경악에 가까웠다. 

그리스 비극의 심리적 바탕이 된 것은 아마 ‘운명’ 에 대한 두려움이었을 것이다. 미래의 불확실성에서 오는 이 두려움을 그리스인들은 비극을 통해 해소했다. 영웅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을 통해 ‘연민’을 느끼고 그의 몰락에 ‘공포’를 느끼는 가운데 그들은 ‘운명’이 주는 심리적 압박을 배설(카타르시스)했던 것이다.

다윈의 진화론 중 성선택 sexual selection. 자신이 생물학적으로 뛰어난 형질을 가지고 있으며, 그래서 가족 부양 능력이 출중함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동물들은 자주 행동하는데 그것이 이성에게 매우 매력적으로 보여서 짝짓기에도 유리하고, 덕분에 다음 세대에 자신의 유전자를 전할 가능성도 높아진다는 것. 다윈은 성적 에너지가 왕성한 데 비해 그것을 충분히 발산하고 표현하지 못해 ‘승화’시킨 것이 예술이라고 주장한 프로이트는 틀렸고, “인류가 살아있는 한, 에로티시즘은 예술의 원천으로 존재한다”며 섹스 에너지가 예술 창작의 원동력이라고 믿은 장 콕토는 옮다고 손을 들어준 셈. 진화심리학은 우리가 이토록 열정적으로 음악을 즐기는 이유를 성선택 이론으로 설명한다.



3. 자살 _금기인가, 인간만의 권리인가 / 자신을 수단으로 전락시키는 행위인가, 아니면 생의 완성인가



4. 키스 _ 천국의 언어가 아직도 남아 있다면

키스는 신과 동물이라는 이중의 ‘기원’을 가지며, 또한 신성과 성애라는 이중의 ‘의미’를 갖는다. 신화와 설화에서 키스는 ‘생령’을 들이마시거나 불어넣는 행위였다. 하지만 진화론적 설명에 따르면 입키스는 새끼에게 먹이를 주는 행위에서 유래했다.

사랑하는 여인과 키스를 하면 3분도 3초처럼 짧게 느껴지지만 난로 위에 손을 얹어 놓으면 3초도 3분처럼 길다. 아인슈타인이 설명하는 상대성 이론.



5. 트랜스포머 _ 육체를 바꿀 수 없는 인간들의 욕망

     고대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에 따르면 만물은 유전한다. 이 때문에 우리는 같은 강에 두 번 몸을 담글 수 없다. ‘변형’은 특별한 현상이 아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형태를 바꾸기 떄문이다. 우주도 탄생 이후 변형되어왔고, 지구도 그위에 사는 나도 달라져있다. 물론 <트랜스포머>의 ‘변형’은 일반적 의미의 만물 유전을 말하는게 아니다.
우리의 맥락에서 관심을 끄는 것은 역시 한 형태가 완전히 다른 형태로 바뀌는 급진적 변형이다. 자연 속에는 그런 놀라운 변형의 예가 존재한다. 가령 곤충의 ‘변태’나 달걀의 부화, 새끼 고슴도치의 등이 태어난지 몇시간 만에 새까만 가시로 뒤덮이는 모습 등.
동일한 사물이 형태만 바꾸는 것이 ‘변형 transformation’이라면 한 사물이 완전히 다른 사물로 둔갑하는 것은 ‘변신 metamorphosis’이다. 변신은 마법과 신화의 영역에 속한다. 가령 해리포터는 마법의 지팡이로 한 사물을 완전히 다른 사물로 바꾼다. 그리스 신화에서 신은 종종 동물로 둔갑하고 인간은 종종 식물로 변신한다. 특히 아폴론의 연애 행각은 종종 연인의 죽음이라는 비극적 결말로 끝나는데, 그때마다 그는 죽은 연인을 식물로 둔갑시키곤 한다. ‘아폴론의 연애 행각이 없었다면 오늘날 식물도감은 매우 빈약했을 것이다.'

     ‘변형’의 모티브는 디자인에서도 중요한 영감의 원천이 된다.
     변형 디자인에는 크게 세 가지 원칙이 있다고 한다.
     첫째, ‘재분재 re-distribution’는 사물이 이루는 요소들의 물리적 배치를 바꾸는 것이다. 가령 펼치면 침대가 되는 소파. 사물의 형태와 기능이 바뀐다.
     둘째, ‘재정향 re-orientation’사물의 위치를 바꾸는 것. 벽에 세워져 있다고 당기면 내려오는 침대. 사물의 형태와 기능은 변하지 않는다.
     셋째, ‘통합 integration’언 외부 요소를 첨가해 해당 사물의 형태와 기능을 바꾸는 것

     <트랜스포머>에 등장하는 오토봇과 디셉티콘은 변형 디자인의 ‘재분배’원칙을 사용하고 있음. 영화 제작자들은 그들의 디자인 속에 타당한 물리학을 구현하여 로봇의 크기가 그것이 변장한 형태(자동차)에 조응하게 만들었다. 위상학적으로는 해답을 제시하지 못했다. 설사 미래에 그와 같은 변형 기술이 개발된다 해도 그것은 영화에서처럼 기계공학적 방식이 아닌 후기 생물학적 방식을 택할 것이다. 애벌레는 완벽하게 잠자리의 성체로 변태를 하지 않던가.



6. 라디오 _ 선전 선동 도구에서 학창시절의 추억까지, 현대에도 이어지는 따뜻한 구술 문화

라디오를 보고 있노라면 세상의 모든 기술은 제자리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수많은 기술들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요즘, 결국 살아남는 것은 우리 곁에서 우리 삶을 더욱 인간적이고 풍요롭게 해주는 기술들이다



7. 학교짱 _ 수컷들의 세계는 어디에서 시작되었나

불안과 열패가 불러온 야만과 폭력
덜 자란 어른들이 만들어내는 폭력의 맹아



9. 육식 _ 끊을 수 없는 ‘남의 살’에 대한 갈망

영국의 작가 존 버거는 <왜 동물을 보는가?>라는 에세이에서 인간은 동물과 접촉하지 않게 되면서, 특히 눈과 눈을 서로 들여다보지 않게 되면서 동물들과 잔인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에 다르면 서구에서도 산업화와 더불어 육류 소비가 급증했다고 한다. 소득이 늘자 노동계급까지도 대거 고기 소비에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때쯤 상류층은 고기의 폭식에서 벗어나 열량이 적은 가벼운 식단으로 바꾸기 시작한다. 물론 이는 양 적고 질 좋은 음식을 통해 자신들을 하류계층과 차별화하려는 일종의 기호학적 행위다. 고기가 사회적 기호의 기능을 상실하자 외려 채식이 고급스러운 식문화로 부각되고, 육식은 노동계급적인 식단으로 여겨지기 시작한다.

인류가 채식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주장에는 크게 네 가지 근거가 있다. 인간의 건강, 동물의 권리, 식량의 배분, 생태의 보존



11. 낙서

호모 텔레포니쿠스 Homo telephonicus 들은 왜 전화 통화를 할 때 낙서를 즐기게 되었을까? 이 낡은 질문에 최근 흥미로운 대답을 찾아낸 사람들은 신경과학자들이다. 우리 뇌는 도형이나 패턴 같은 영역을 담당하는 부분과 언어를 담당하는 부분이 평소 활동량이 높은데, 전화 통화를 하는 동안에는 온통 언어 영역만 활성화되다보니 도형과 패턴을 담당하는 뇌 영역이 심심해져 기하학 문양이나 사람 얼굴을 그리는 것이라고 한다.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뇌활성화의 균형을 유지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상대방의 얼굴은 보지 못한 채 목소리만 들으려니 시각정보에 대한 균형을 맞추려고 낙서를 한다는 주장이다.



13. 트위터

되도록 자신을 많이 복제해 널리 확산시키고 싶어 하는 게 유전자의 본능이다. 문화에도 유전자처럼 복제 기능을 가진 “밈”이라는 유전자가 있다는 이론 (이라기보다는 은유)이 있다. 트위터의 멘트는 이 밈을 닮았다. 하지만 본능이 항상 이성적인 것은 아니다. 

밈 meme : 유전자처럼 개체의 기억에 저장되거나 다른 개체의 기억으로 복제될 수 있다는 문화의 전달 단위로 영국의 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의 저서 <이기적 유전자>에 소개된 용어. 문화의 전달에도 유전자처럼 중간 매개물이 필요한데, 이 역할을 하는 정보의 단위가 밈



15. 케이팝 

사회 집단에 동조하려는 성향은 대뇌에서 그대로 나타났다. 처음에 아무 정보 없이 노래를 들었을 때 쾌락의 중추인 ‘미상핵’이 활성화되었다. 반면 인기 순위를 알고 난 뒤 노래를 들을 때는 선호도는 올라갔지만 미상핵의 활동이 늘어나진 않았다. 오히려 고통이나 역겨움을 표상하는 ‘섬피질’이 활성화되었는데, 노래에 대한 대중의 인기가 자신의 취향과 다를수록 그만큼 ‘대중의 선호에 따라야 한다’는 감정적 부담이 커지기 떄문에 10대이 뇌 안에서 고통과 관련된 섬피질이 활성화된 것이다.



16. 나는 꼼수다

매클루언은 전자매체와 더불어 ‘구텐베르크 은하’가 종언을 고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나꼼수는 이 새로운 전자 구술 문화의 디지털 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나꼼수의 이른바 ‘발랄함’과 ‘분방함’은 이 매체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말과 글은 다르다. 말로 전달되는 정보는 강하게 구술문화의 성격을 띤다. 구술문화에서는 로고스 logos 보다는 뮈토스 mythos 가 중요하다. 즉 상황의 객관적 기술보다는 허구가 뒤섞인 이야기, 냉철한 논리의 정합성보다는 뜨거운 정서적 공감대가 더 잘 어울린다.



19. 4대강

각하의 미감을 파악하려면 자연미와 예술미(인공미)의 관계에 관한 18세기 미학 논쟁으로 돌아가야 한다. 당시에 낭만주의자들은 자연미를 예술미 위에 올려놓았다. 가령 칸트에게 자연은 인공의 모범, 위대한 예술은 자연처럼 보여야 한다. 실제로 독일 낭만주의자들의 작품 속에서는 마치 자연이 살아서 꿈틀거리는 것처럼 느껴진다. 낭만주의적 관념 속에서 인간은 대자연에 포섭된 미약한 존재일 뿐이다.
반면 헤겔과 같은 고전주의자들은 예술미의 우월함을 믿었다. 왜 예술이 필요한가? 헤겔에 따르면 그것은 자연의 결함 때문이다. 자연은 불완전하기에 그것을 인공미 (예술)로 완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헤겔의 생각은 근대 개발주의 이데올로기의 미학적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자연을 인간(의 필요)에 뜯어 맞춰라. 카를 마르크스까지도 이 이데올로기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자연이 인간화. 그것이 진보다'
산업혁명은 개발 이데올로기의 기술적 실현이었다. 이후 자연은 정복의 대상이 되었다. 자연은 무엇인가? 그것은 ‘자원의 보고’, 즉 마음대로 꺼내다 쓸 수 있는 자원의 창고다. 존재하는 것은 그저, 자연을 착취해 얻은 결과물을 ‘사적으로 분배하느냐’, ‘사회적으로 분배하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20세기 초 독일 사민당의 강령 한 구절. “자연은 공짜로 존재한다."
이것이 헤겔의 ‘주객동일성’ 원리의 현실적 함의다. 주체(인가)와 객체(자연)의 동일성을 추구한다는 것은 곧 자연에서 오직 인간의 필요에 적합한 것만 본다는 걸 의미한다. 가령 A와 B를 잇는 최단 코스는 직선이라는 명제에 따라 숲을 가로질러 도로를 건설하면 숲의 생명은 끊어지고 동물들의 생태계가 파괴된다.
이로써 자연의 진짜 자연스러운 모습은 간단히 파괴된다. 물론 개발을 통해 우리는 자연의 위협에서 벗어나 발전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결과 이제는 거꾸로 인간이 자연을 위협하게 되었다. 한동안 인간들은 자신도 자연에 속한 존재라는 것을 망각하고 살 수 있었다. 하지만 자연의 복수가 인간의 생체에 미치기 시작하자 이 미친 개발주의의 무덤에서 서서히 생태주의 의식이 자라났다.
 이 변화는 서구사회가 산업사회에서 산업 이후 사회로 이행하는 시점에 발생했다. 산업사회의 목표가 자연력을 인공력으로 바꾸어놓는데 있었다면 산업 이후 사회에서는 외려 인공력으로 자연을 모방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가 된다. 미메틱 (mimetic, 재현적, 모방적) 테크놀로지야말로 산업 이후의 새로운 기술의 상징이다.
인터페이스의 관점에서 접근해보자. 가령 산업혁명의 인터페이스는 기계에 인간의 신체를 뜯어 맞춘다. 한마디로 인간이라는 생명체마저 기계로 바꾸어놓는 셈이다. 그러다보니 노동자들에게는 군대식 규율이 요구되었다. 
정보 혁명의 시기에는 역전이 일어난다. 디지털 인터페이스의 목표는 생체를 기계에 맞추는 게 아니라 기계를 생체에 맞추는 데 있다. 최근 유행하는 디지로그라는 말은 이 생체친화적 기술의 다른 이름일 것이다. 디지털은 순수 수학적 (0, 1) 기술이나, 우리는 그것을 이용한 장치를 거의 아날로그 세계의 대상처럼 다룰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이 ‘자연의 인간화’에 대립되는 ‘기계의 생체화’다



인사이트/책 2015. 1. 25. 03:17

[책] 정재승+진중권, 크로스 1





  • <발췌>
이 책의 의도는 동일한 사안을 놓고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시각을 교차시켜, 거기서 확인되는 편차를 통해 사물을 더 깊이 이해하자는 데 있었다. 이 컨셉 자체가 현실의 층위에 정보의 층위가 겹쳐지고, 예술과 과학/기술의 경계가 흐려져 하나로 융합되는 시대를 반영할 것이다. 이 책은 ‘디지털 생활 세계의 현상학’을 구축하기 위한 첫걸음이다.

1. 스타벅스 _ 입맛으로 나, 우리, 그들을 구별하는 세상

     취미, 취향 이라는 낱말은 글자 그대로 입맛 taste를 뜻했다. 이 낱말이 이성중심주의 문화 속에서 시각과 청각의 섬세함으로, 지각 능력으로 전의된 것이다. 노르베르트 엘리아스는 감각의 섬세화를 문명화 과정, 특히 궁정화의 산물로 설명한다. 폭식과 폭음을 일삼던 중세의 호전적 전사들이 궁정에서 귀족으로 변신하는 과정에서 점차 취향의 섬세함을 평가하게 됐다는 것이다. 이 세련된 궁정 취향은 훗날 시민계급에 받아들여지고, 민주주의와 시장주의의 확산을 통해 일반 시민들에게까지 퍼진다.

     스타벅스는 커피의 입맛 taste를 하나이 미학적 취향 taste로 바꿔놓았다. 커피잔과 아이템 위에 새겨진 로고는 그것을 소유한 이가 어떤 ‘취향 공동체’의 일원이라고 말해준다. 일종의 ‘종족화’현상이랄까.

     상품을 통해 특정 계층에 속한다는 사실을 과시하는 것을 장 보드리야르는 ‘파노플리 효과’라고 불렀다. 피에르 부르디외라면 이를 계급적 차이를 드러내기 위한 ‘구별 짓기’로 설명할지 모르겠다. 시뮬라시옹의 세계에서는 허구 자체가 세계가 되는 법. 허구로서의 커피, 서사로서의 커피가 오늘날에는 이미 에스프레소의 진한 액체만큼 진한 물질적 현실이다.

     대중은 상품과 상품 사이의 ‘차이’를 소비한다. 중요한 것은 사용가치가 아니라 기호가치다. 생산과 소비의 물질적 모델은 산업사회에 속하는 것. 그것에 대한 정보사회의 모델은 비물질화 혹은 재물질화, 다시 말해 물질이 아닌 브랜드 그 자체, 혹은 물질의 디자인과 결합된 브랜드일 것이다. 스타벅스는 취미를 선사하고 전달하고 창조하는 문화적 매체다. 오늘날 기업은 취미로 묶인 상상의 공동체를 수신자로 갖는 미디어가 됐다.

     파노플리 효과 : 파노플리란 ‘집합’이란 뜻으로, 판지에 붙어 있는 경찰관 놀이 장난감 세트처럼 ‘동일한 맥락의 의미를 가진 상품의 집단’을 말한다. 어린아이가 경찰관 놀이세트를 사용하면 마치 경찰관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낀다. 마찬가지로 파노플리를 이루는 상품을 소비하면 그것을 소비할 것이라고 여겨지는 집단에 소속한다는 환상을 주는 것

     맥도널드 가게의 로고를 보여주면 뇌 영역중 ‘고통과 불쾌’를 표상하는 인슐라가 활성화되지만, 스타벅스 로고를 보여주면,, 즐거움의 중추와 브랜드의 가치를 음미하는 전전두엽이 활성화 되기 시작한다.



2. 스티브잡스 _ 디지털 세상, 어떤 사람이 구루가 되는가

현실왜곡장 : 마치 물리학 용어처럼 보이지만 사실 스티브잡스를 위해 만들어진 말이다. 잡스가 보여주는 현실왜곡장의 대표적 효과는 잡스 근처에 가면 모든 현실이 왜곡되어 보인다는 것이다. 잡스 옆에서 그가 하는 말을 듣고 있으면 평소에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던 일들을 자신도 모르게 믿게 된다. 잡스의 현실왜곡장은 잡스를 중심으로 형성되며 중심으로부터 거리가 멀수록 그 힘이 약해지기 때문에, 보통의 경우는 사람들이 한번 현실왜곡장에 들어갔더라도 잡스에게서 거리가 멀어지면 제정신으로 돌아온다고 한다.



3. 구글_ 검색을 잘하면 지능도 발달할까

     기계 검색이 열어주는 새로운 인식론적 의미를 인식해야한다. 흔히 우리는, 정보는 해독이 중요하고 검색은 부차적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정보가 희귀하던 시절의 낣은 습관인지도 모른다. 정보의 홍수 시대에는 해독하는 능력보다는 범람하는 정보 속에서 자기가 필요로 하는 정보에 성공적으로 접근하는 능력이다. 그런 의미에서 검색엔진은 정보의 바다에 떠 있는 구명보트라 할 수 있다.
기계검색은 정보를 생산하는 방식 역시 변화시킨다. 모던예술가들은 일찍이 “새로움은 요소가 아니라 배체이 있다”라고 말한 바 있다. 중요한 것은 새로운 정보를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정보들을 새로운 방식으로 조직하는 것이다.

     디지털 시대의 기계적 영감. 구글에 들어가 검색창에 낱말을 타이핑하면, 단지 그 낱말이 포함되어 있다는 단순한 이유에서 이제까지 생각지도 못했던 수많은 텍스트가 화면에 나타날 것이다. 기계가 전혀 엉뚱한 자료를 내밀 때, 인간은 본의 아니게 자신이 상상할 수 있는 한계 밖에 존재하는 정보를 접하게 되기 때문이다. ‘영감’이란 인간이 합리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범위의 바깥에서 불현듯 사건처럼 찾아오는 어떤 것이다.



4. 마이너리티 리포트_ 미래를 예측한다는 위험한 욕망

     제작에 들어가기 몇 년 전에 스필버그 감독은 2054년의 사회가 어떻게 될지 상상하기 위해 도시 계획자, 기술 혁신자, MIT 연구원들을 포함한 다양한 분야의 미래 예측가들이 사흘에 걸친 회의를 열었다고 한다. 1930-40년대의 SF가 과학작들의 캐리커처만 그리느라 그 안에 진짜 과학적 정보는 들어있지 않았다면, 마이너리티 리포트는 기술의 현재와 미래에 대한 현실적 예측에 기초한 ‘기술적 상상’의 구현이라 할 수 있다. 

     오스트레일리아의 미디어 아티스트 제프리 쇼는 ‘그동안 컴퓨터 기술의 발전에서 예술가들의 역할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라고 말한다. 오늘날 대중화된 인터페이스의 상당수가 실은 미디어 아티스트들의 실험에서 영감을 얻은 것들이다. 문학의 역할 역시 빼 놓을 수 없다. 언더코플러는 말한다. “지난 10년간의 ‘사이버’연구는 그보다 10년 앞서 유행했던 사이버펑크 문학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5.  제프리 쇼_ 캔버스 위 예술가와 실험실의 과학자 사이

     ‘신체에서 벗어나는 체험 disembodiment’을 넘어 ‘다시 신체로 들어오는 체험 reembodiment’을 지향하는 파타피지컬 한 세계

     제프리 쇼의 미학적 측면을 적절히 기술해주는 것은 마르셸 뒤샹에게서 빌려오는 ‘초박막 infra-mince’이라는 개념일 것이다. 그는 초박막을 가상과 현실 사이에 존재하는 일종의 관념적 공간인 제 3의 공간으로 규정한다. 

     가상과 현실을 오가며 사는 현대인은 제프리 쇼의 말대로 ‘파타피지컬 한 종 pataphysical species’이 될 것이다. ‘파타피직'은 프랑스 작가 알프레드 자리 Alfred Jarry가 사용한 신조어로, 거칠게 우리말로 옮기면 ‘사이비 물리학’이라 할 수 있다. 현실과 가상이 어지럽게 뒤섞인 세계의 상태를 가리킬 수도 있고, 과학과 은유가 어지럽게 뒤섞인 의식의 상태를 가리킬 수도 있다. 오늘날 우리는 어차피 공상과학이 된 현실 속에 살고 있지 않은가.
    
     파타피직은 은유 metaphor 대신에 파타포 pataphor를 사용한다. 예를 들어 치열한 싸움이 벌어지는 전쟁터가 물리적 현실이고 장기판이 그 물리적 현실의 시뮬레이션, 즉 전쟁터의 은유라면, 파타피지컬 한 상태는 장기판 위에서 말이 움직이는게 아니라 정말로 인간 병사들이 움직이는 상황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해리포터의 체스판 장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체스판)



7. 헬로키티_다음 세기에도 사랑받을 그녀들의 분홍 고양이

     사람들은 얼굴을 보며 상대의 감정 상태를 잘 읽어내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주로 눈을 관찰하면서 감정을 읽어내고 있었다. 하지만 편도체가 망가진 사람은 얼굴 표정에서 눈을 제대로 보지 않고 코와 입을 주로 보며 감정을 제대로 읽어내지 못했다.
     
     흰자위 없이 까만 눈동자만 있는 아무런 감정을 표현하지 않는 키티의 눈에 사람들은 자신의 감정을 투영해 다양하게 감정을 읽는다. 

     키티는 입이 없어서 우리에게 어떤 말도 하지 않는다. 그 마음을 도무지 알수가 없어 신비로운 뿐이다. 키티로 온 방을 채우고도 그 마음을 알 수 없기에, 동일시하기 힘들기에, 키티라가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8. 셀카 _ 기술은 끊임없이 자아도취를 향한다

     기술이 인간을 바꾸는 유용한 예, 그러나 셀카카 ‘정직한 삶의 기록’이 될 수 없는 이유
     
     내가 찍는데도 (혹은 내 가장 가까이에서 찍는데도), 나의 진짜 모습이 아니라 ‘가장 왜곡된 모습’을 담아낸다는 점에서 셀카는 ‘삶의 기록’이 아니라 ‘욕망의 기록’이다

     아날로그 시대에 카메라 기능이 다분히 ‘집단적’이었다면, 주머니 속에 들어가는 폰카나 디카의 기능은 지극히 ‘개인적’이다. 이것이 카메라에 찍히는 제재의 성격도 규정한다. 즉, 특별한 계기에 동원되는 아날로그 사진의 제재가 다분히 ‘공식적’이라면, 특별한 일 없어도 늘 휴대하고 다니는 폰카의 제재는 지극히 ‘일상적’이다.

     셀카의 미학 1) 메모리 - 부족한 메모리는 얼굴에서 잡다한 결함을 지워버린다. 한정된 메모리가 인물의 이상화에 필요한 추상 역할을 해주는 것 2) 퍼스펙티브 - 얼짱각도, 3차원 공간을 차지하는 물체를 2차원의 평면 이미지로 번역할 때, 거기에는 이론적으로 무한수의 각도가 존재한다. 맘에 드는 하나를 뽑아낸다는 의미에서 역시 미적 이상화를 위한 추상 3) 이미지 프로세싱 - 형태를 변형시키는 고전주의 노선, 색채나 조명을 조작하는 바로크 노선

     그리스인들이 신을 닮으려 했다면, 현대의 대중은 스타를 닮으려 한다. 셀카는 불완전한 현실의 여체들로부터 완전한 아프로디테의 형상을 추출하던 페이디아스의 조각칼이다.

     발터 벤야민은 그의 유명한 논문에서 ‘자기를 연출하는 소비에트의 대중’에 대해 얘기한 바 있다. 사진과 영화라는 복제기술이 인민대중으로 하여금 예술 작품의 영웅(=주인공)이 될 수 있게 해주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그는 대중 매체에서 신분제를 깨뜨리는 사회주의적 평등주의의 가능성을 보았다. 하지만 그의 기대와 반대로 그의 꿈은 외려 자본주의적 방식으로 실현된 듯하다. 영화로 자기를 연출하던 사회주의적 대중은 오늘날 셀카로 자신을 연출하는 자본주의적 대중이 됐다.



9. 쌍꺼풀 수술_ 왜 눈 위의 작은 선 하나가 그토록 중요한가

     사회적 온전한 성원이 되고자 눈두덩에 받는 할례



11. 안젤리나 졸리_ 아름다움도, 도덕도 스스로 창조하라

     미덕, 악덕 상관없이 개별자의 절대적 자유를 가지고 더 높은 사회적 윤리에 자발적으로 복종한다. 졸리는 형해화한 기존 도덕을 따르는게 아니라, 자신의 도덕을 자기 스스로 만들어나간다.



13. 몰래카메라_ 나는 모든 것을 다 보고 싶다

     어디든 있으나 어디에도 없는 신의 눈, 신의 역할을 넘겨 받은 유비쿼터스, 범법 행위를 합법적 오락으로 만드는 관음증의 도구

     시선의 권리, 시선의 권력 : 자크 데리다 혹은 폴 비릴리오의 ‘시선의 권리’를 우리는 ‘시선의 권력’이라는 표현으로 바꿔놓을 수 있을 것이다. 상대에 대한 시야를 확보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그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하는 것을 의미한다. 국가는 왜 도처에 카메라를 깔아놓으려 할까? 그것은 자신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게 존재한다는 것을 참지 못하는 것이 권력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권력을 행사하려면, 그 대상에 대한 시야를 확보해야 한다. 그러므로 카메라 렌즈로 누군가를 포착한다는 것은 법적, 정치적 의미에서 그를 체포하는 것이기도 하다.

     요즘 몰래카메라를 사용하는 과학자들의 최대 화두는 ‘카메라에 담긴 영상’을 통해 인간의 행동, 언어적/비언어적 커뮤니케이션을 어떻게 자동적으로 정량화할까 하는 것이다. 



14. 개그콘서트_ 웃음, 열등한 이들의 또 다른 존재 증명

     우리에게 웃음은 ‘유머에 대한 생리적 반응’이 아니라 ‘인간관계를 돈독하게 해주는 사회적 신호’라는 메시지를 전해준다. 친하거나 호감이 가는 상대와 대화를 나누는 것이 즐거워 웃는 것이지, 농담을 주고받아야만 웃음이 터지는 것은 아니다.

     과학자들은 반전을 ‘모순 이론’으로 설명한다. 논리적으로 쉽게 연결되지 않거나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이 벌어질 때 사람들은 갈등 (혹은 모순 incongruity)을 경험하고, 그것이 해소 resolution되면서 웃음을 터뜨린다는 것이다.

     미국 심리학자 피터 더크 박사는 ‘반전 개그’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과정이 지능 발달에 매우 유용하다고 주장한다. 예상치 못한 결말이 전체 이야기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는 이 짧은 반전의 순간에 뇌에서는 복잡한 정보 처리 과정이 일어나며, 창의력처럼 고등한 사고 과정을 담당하는 뇌 영역이 활발히 활동한다는 것이다.

     희극은 플롯이 시간축을 따라 인과적으로 전개된다. 스탠딩 코미디는 이미 20세기 예술에 나타난 서사의 파괴가 대중 문화의 현상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중요한 것은 서사의 시간적 전개의 끝에 찾아오는 급전의 깨달음이 아니라, 순간순간 터져 나오는 이미지의 전복, 뉘앙스의 일탈, 의미의 전환이다. 텍스트는 시간적으로 전개되나, 이미지는 공간적으로 제시된다. 문자문화의 끝 자락을 입은 구세대는 코미디에서 플롯의 시간적 전개와 반전을 기대하지만, 이미 영상 문화의 홍수 속에 사는 신세대는 플롯이 흐르지 않는 영원한 현재 속에서 순간마다 튀어나오는 이미지의 돌발을 즐기려 한다.



16. 세컨드 라이프 _ 그곳에서는 정말 다른 인생이 가능할까

     세컨드라이프 해방군 사건에 대한 격렬한 논쟁의 주요 흐름
     좌파의 시각 : 사이버 공간에 기업의 돈이 들어와서 문제가 생겼다
     우파의 시각 : 사이버 공간에 테러리스트들이 들어와서 문제가 생겼다
     자연주의자의 시각 : 사이버 공간에 인간이 들어와서 문제가 생겼다

     세컨드 라이프를 드나들며 우리는 신체화와 탈신체화를 번갈아 체험한다. 그것은 어떤 의에서 영적 체험을 세속화한 것이기도 하다

     현실의 세계는 하나이지만, 가상의 세계는 여럿일 수 있다. 영국의 미디어 이론가 로이 애스콧은 세 개의 VR에 대해 이야기한다.
          물리적 법칙이 작용하는 검증현실 Validated Reality
          디지털 테크놀로지가 만들어내는 가상현실 Virtual Reality
          식물의 환각 작용을 이용해 입장할 수 있는 식물현실 Vegetable Reality
     애스콧은 이제 인류는 물리적 신체와 가상적 신체와 환각적 신체를 갈아입으며 한 세계에서 다른 세계, 거기서 또 다른 세계로 자유로이 넘나들 수 있게 됐다고 주장한다



18. 레고 _ 작게 쪼갤수록 무한 확장하는 상상력

     레고 블록으로 건축물을 쌓는 동안, 아이들은 “여럿이 모이면 달라진다 More is Different”라는 복잡계 과학의 핵심 메시지를 자연스레 배우게 된다. 

     세상에서 가장 창의적인 장난감은 ‘쓰레기 더미와 자연’이다. 잘 갖추어진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아이들보다 장난감이 하나도 없어 장난감을 ‘만들어서’ 노는 아이들이 실제로느 창의적이라는 연구 결과는 장난감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공한다 (실제로 가장 창조적인 사람들은 레고를 조립하며 노는 어린이가 아니라, 레고 회사에서 ‘장난감’을 만드는 기술자들이다)

     레고의 매력은 역시 원자론적 원리에 있다. 데모크리토스 원자론 (만물의 근원은 더 이상 쪼개지지 않는 입자로 구성되어 있다)은 매우 매력적인 학설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다양한 사물이 결국은 원자들의 상이한 배열의 결과라는 이야기. 이는 철학의 근본 문제에 대한 경제적이면서도 매우 미학적인 솔루션이다. 

     레고는 에코가 말한 ‘열린 예술 작품’이다. 플라스틱 모델의 조립은 결국 디자이너가 고안한 형태를 그대로 재연하는 데 그 본질이 있다. 조립에 들어갈 때부터 실현해야할 최종적 형태가 결정되어 있는 셈이다. 하지만 레고 블럭 앞에 앉은 아이는 아직 결정되지 않은 무한한 잠재성의 세계 앞에 앉아 있는 것이다. 레고 블록이 만들어낼 세계는 아이의 머릿속에 들어 있다. 아니, 머릿속에서 이제 막 자라나고 있다. 그것은 수많은 결단과 망설임을 동반하며 아이의 손끝에서 형성되어갈 것이다.



19. 위키피디아 _ 사이버 민주주의를 실험하다

문자 이전의 구술문학처럼 공동 작업의 산물

과거의 백과사전은 필자와 독자의 신분적 구별 위에 서 있었다. 이 관계에서는 유식한 지식인이 무식한 민중을 깨우치는 일방적 ‘계몽’만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위키피디아는 필자와 독자의 이 신분제를 무너뜨렸다. 거기서는 독자가 필자가 된다. 계몽주의가 민주주의 프로젝트의 일환이었고, 민주주의가 자기 자신을 다스리는 ‘자치’의 이념이라면, 위키피디아는 이 계몽주의가 목표로 삼았던 민주주의의 궁극적 완성이라 할 수 있다. 이제 민중은 스스로 가르치고, 스스로 배운다.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위키피디아의 성장은 전형적인 자기조직화 시스템 self-organized system의 발로다. 서로 쉽게 연결되고 모이면 새로운 형질이 창발되는 복잡계 시스템의 특징이 급속도로 성장하는 위키피디아를 탄생하게 만든 것이다.

컨설팅 전문가이자 <위키노믹스>의 저자 돈 탭스코트와 앤서니 윌리엄스는 기업들이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유능한 인재를 찾아내 난해한 문제에 새로운 아이디어를 구하는 혁명적인 시장에 주목했다. 그들은 이러한 시장을 ‘이데아고라 Ideagoras’라고 부른다. 고대 아테네 시민들의 정치 및 상업의 중심지였떤 아테네 시민광장 아고라처럼, 저자는 ‘이데아고라’가 과학기술의 중심이 되리라 믿고 있다.



20. 파울 클레 _ 예술의 경계가 무너지다

클레의 우주적 공간에는 리듬과 화음, 그리고 멜로디가 가장 기본적인 구성요소로 자리 잡고 있다.

우주의 구성입자와 그들 사이의 상호작용을 탐구하던 입자물리학자들은 상대성 이론의 거시적 연속성과 양자역학의 미시적 불연속성 사이에 존재하는 모순을 해결하고자 20세기말 ‘대담한 가설’ 하나를 세운다. 이 우주가 11차원 (혹은 26차원)으로 구성되어있으며 그 안에 담긴 물질은 ‘끈’ 모양의 기본 입자가 기타 줄처럼 진동하는 유형에 따라 고유한 성질을 나타낸다는 주장이다. 이 이론을 초끈 이론이라고 부르는데, 우주를 생성과 소멸의 과정으로 보는 빅뱅 이론과는 달리, 영원히 성장과 수축을 반복하는 세계로 파악한다. 불꽃놀이를 하듯 폭발하고 끊임없이 갈래가 져나가는 클레의 <우주적 구상>에는 수많은 초끈이 연주하는 ‘우주 교향곡’이 장중하게 연주되는 듯하다

“색은 영혼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는 힘이다. 색은 키보드이고, 눈은 망치이며, 영혼은 끈이 달린 피아노이다. 예술가는 연주하는 손으로 하나의 키 또는 다른 키를 두들겨서 영혼이 떨리게 만든다.” 칸딘스키

이 “공감각적인” 주제는 21세기 현대 예술에 가장 중요한 화두가 될 것이다. 화가들은 지난 5000년간 원근법을 이용해 2차원 캔버스에 3차원 공간을 표현하고자 노력했고, 사실적 묘사로 세상을 통째로 담아내려고 했으며, 빛이 주는 인상을 캔버스에 녹여내려 애썼다. 간단한 도형과 추상으로 세상의 본질을 화폭에 추스르려고도 했으며, 자연의 움직임이나 화가의 붓놀림으로 운동과 시간, 재질과 컨텍스트를 표현하고려고도 했다.

“나는 이 세상에서 이해될 수 없는 존재다. 내가 편안하게 머무는 곳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사람들과 죽은 사람들 사이에 있다. 대개의 경우 창조의 핵심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있지만, 아직 충분하다고 할 만큼은 아니다.” 파울 클레

클레에 따르면 예술에는 ‘근원적 시작’이 있다. ‘근원적 시작’이란 한마디로 창세를 말한다. 예술의 과제는 이 ‘창조 과정의 기적을 가시화해 체험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우주는 사물이 공존하는 상태가 아니라 거대한 생성과 소멸의 운동. 이 ‘사물 생성의 마법’을 클레는 미세한 움직임과 색의 미묘한 배치로 기록한다.

“예술은 가시적인 것을 재현하는 게 아니라, (비가시적인 것을) 가시화한다.” 이렇게 대상의 재현보다는 지각의 조직화를 지향하는 것이 현대 예술의 특징이다. 하지만 클레가 이 말을 했을 때, 거기에는 이런 일반적 의미를 넘어서는 또 다른 뜻이 숨어 있었다. 클레 자신의 말을 저 유명한 물리학 원리, 즉 알버트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와 연결한다. “지금은 가시적인 사물들의 상대성이 분명해졌다. 가시적인 것은 우주 전체에서 그저 고립된 예에 불과하다. (우주에는) 또 다른 진리가 엄청나게 많이 잠재되어 있다. 사물들은 더 넓고, 더 다양한 의미로 나타난다."

“여러 개의 독립적인 주제가 동시에 공존하는 현상은 음악에만 있는 게 아니다. 이는 모든 전형적인 사물들이 한 장소에서만 효력을 발휘하는게 아니라, 그 어느 곳이나 도처에 뿌리박고 유기적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한마디로 고전음악의 폴리포니(다성음악, 음악에 도입된 공간구조)는 음악에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라, 우주의 모든 것에서 발견되는 우주의 원리라는 것이다.

클레는 문자언어를 형상언어처럼 사용했다. 실제로 그는 관객에게 자신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문자나 기호, 텍스트를 소리내어 읽으라고 요청했다. 시각과 청각의 공감각으로 관객의 심리에 영향을 끼치려 했던 것이다. 이때 침묵의 장르에 속하는 그림은 음성회화, 즉 소리 나는 회화가 된다.

클레는 정신을 표현하려 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묘사해야 할 대상이 있었다. “대상은 세계였다. 물론 눈에 보이는 이 세계는 아니지만.” 그의 작업은 외부의 ‘재현’도 아니고, 내면의 ‘표현’도 아니었다. 클레는 자신을 영매로 생각했다. “작품은 저절로 발생한다. 그래픽은 열매처럼 무르익어 저절로 떨어진다. 나의 손은 내가 아닌 어떤 의지의 도구다."

클레는 어떤 유파에도 속하지 않았고, 스스로 유파를 창시하지도 않았다. 형식의 완전성에 집착하는 그의 태도가 어떤 눈에는 충분히 현대적이지 않게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미지와 텍스트의 결합으로 실재적인 것과 환상적인 것이 뒤섞인 잠재적 세계를 실현한다는 점에서, 클레는 이미 디지털 생성의 시대를 예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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