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이트/책 2015. 7. 30. 00:14

[책] 놀이와 예술 그리고 상상력



놀이와 예술 그리고 상상력

저자
진중권 지음
출판사
휴머니스트 | 2005-03-21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1. 유쾌한 미학자 진중권의 7가지 상상력 혁명 우리에게 '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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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가 부활한 이유 : 커뮤니케이션 수단이 영상 매체로 옮겨가면서 이미지적 사유를 하는 세대가 됨


상상력의 종류

     - 주술적 상상력 <반지의 제왕>

     - 정상적 논리를 뒤집는 역설과 무의미의 수학적,논리학적 환상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 철학적 판타지. 보르헤스의 소설돌

     - 과학적 환상 <매트릭스>

     - 공상과학의 fiction이 과학기술 덕에 현실이 됨 -> 오느란ㄹ의 상상력은 ‘기술적 상상력’ (빌렘 플루서)


상상은 정신의 놀이다. 미래에는 노동이 유희가 될 것이라는 카를 마르크스의 예언은 맞았다. 상상력이 생산력으로 진화하면서 노동은 점차 유희에 가까워지고 있다. 미래의 윤리학은 미학이 될 것이라는 그의 예언도 실현되고 있다. 상상력은 미학의 영역이며, 이 여역은 진위와 선악의 피 안에 있으려 하기 때문이다. 사유가 이미 있는 것을 재현(representation)하려 할 때에는 ‘대상과 일치’라는 인식론적 구속을 받지만, 아직 없는 것을 있게 하는 (presentation) 상상력은 그런 구속을 원하지 않는다


1. 우연과 필연


<주사위>

24     예술에서 창작의 전부 혹은 일부를 우연에 맡기는 것을 알레아토릭 (Aleatork)이라 부른다. (알레아는 라틴어로 주사위). 알레아토릭과 함께 ‘객체’ 즉 고전적 세계상의 짝인 고전적 ‘주체(subject)’의 개념도 무너진다. 근대의 미적 주체성도 해체된다.


31     카오스(혼돈) + 코스모스 (조화) = 카오스모스 (Chaosmos). 고대의 신화적 카오스에서 근대의 신학적 코스모스로, 거기서 현대의 예술적 카오스모스로. 혼돈 속에서도 질서는 숨어있다


<체스>

50     체스의 역사는 예술의 역사를 닮았다. 고전 예술이 주로 구상이라면, 현대 예술의 주류는 추상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현대 예술은 실물을 닮지 않은 그 추상성 때문에 작품 밖의 현실에 대해 아무 말도 못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낱말이 세상을 닮지 않았다고 세계를 기술할 수 없는가? 체스 말이 실물을 닮지 않았다고 체스를 못 두는가? 실물을 닮지 않은 둥글 넓적한 중국 장기의 말을 가지고도 우리는 얼마든지 초나라와 한나라 사이의 전쟁을 연출한다. 예술도 마찬가지다. 현실을 닮지 않은 추상 예술도 얼마든지 현실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다.


<광대>

65     미학자 아도르노는 ‘어리석음’을 현대 예술의 특징으로 들었다.

“아이들이 광대에게서 느끼는 공감은 예술에서 느끼는 공감이기도 하다”

“짐승/바보/광대라고 하는 짜임새는 예술의 기본 계층이다."

합리성의 눈으로 보면 예술은 어리석어 보인다. 예술은 왜 어리석어 지는가? 합리성에 미쳐버린 현대 사회를 심판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작품의 어리석음은 현실 세계의 합리성에 대한 심판이다."

합리성의 추구가 광기로 치닫는 사회 속에서 진정으로 현명해지려면 예술처럼 어리석어져야 한다.



2. 빛과 그림자


67     제일 먼저 빛과 어움을 가지고 논 이는 신이다. 창조의 첫째날 그는 먼저 빛과 어둠을 가르지 않으셨던가. 실은 자연도 그림을 그린다. 우리처럼 붓과 물감이 아니라, 빛과 어둠으로 제 자신의 형상을 빚어낸다. 우리는 도처에 빛과 어둠으로 만든 형상들을 본다. 그것들은 신의 비밀을 훔쳐서 빚은 이미지들이다.


<카메라 옵스쿠라, 자연의 자화상>

카메라 옵스쿠라, 1646년


81     자연의 마술앞에서 위기감을 느낀 화가들은 신으로부터 불을 훔친 프로메테우스처럼 슬쩍 빛의 그림자를 훔쳣다. 이때만해도 화가는 여전히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영상을 화폭에 고정시키는 것은 여전히 화가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19세기에 사진이 발명되자 상황이 달라진다. 자연의 영상을 평면에 고정시키는데에 더 이상 화가의 손이 필요 없게 되었다. 사진이 회화로부터 ‘재현’의 기능을 빼앗아 가버리자 이 위기에서 현대의 추상회화가 탄생했다. 그에 반해 다른 길로 간 화가들도 있다. 현대는 미디어의 시대다. 우리에게 세계는 그림이 아니라 사진으로 전달되고, 주위에서 보는 것은 원작이 아니라 대부분 복제이며, 그것들은 예술이 아니라 기술의 산물이다. 사진을 거부할 수 없다면 차라리 그것을 끌어안는 것이다. (앤디워홀은 슬라이드를 비춰놓고 따라 그리고, 극사실주의 화가들은 사진과 같은 작품을 그린다)



<라테르나 마기카, 빛으로 빚은 그림>

<빛과 어둠의 위대한 예술> 속의 삽화, 1671년


84     라테르나 마기카의 원리는 정확히 카메라 옵스쿠라의 원리는 뒤집은 것. 카메라 옵스쿠라는 광원이 기계 바깥에 있고 환한 바깥의 영상을 어두운 상자 안으로 받아들인다면, 라테르나 마기카는 광원이 기계 안에 있어 밝은 안쪽의 영상을 어두운 바깥쪽으로 내던지는 이미지 투사 (Projection)


92     영상을 벽에만 투사하는 것이 아니라 흐늘 거리는 연기위에 투사하여 홀로그램 효과, 거울의 반사 효과나 파이프의 음향 효과 등 다양한 장치가 결합됨



<그림자 놀이, 실루엣의 파노라마>

볼탕스키


114     고대 철학자 플라톤은 우리가 사는 세상은 저 천상에 있는 이데아 세계의 그림자라고 주장했다. 동굴의 비유에 따르면 인간들은 세상이라는 거대한 동굴에 갇혀, 동굴 벽에 비치는 그림자 놀이를 참된 실재로 알고 살아가는 죄수와 같은 존재다. 플라톤의 동굴에서 사람들이 담장위로 “온갖 인공의 물품들” 즉 “인물상 및 동물상들”을 쳐들고 지나간다. 동굴의 벽에 거대한 그림자놀이를 펼친다. 볼탕스키의 작품이 연출하는 상황과 닮아있다. 


115     니체 “모든 위대한 사상가는 이 세상이 한갓 가상에 불과하다는 위대한 영감을 갖고 있다"


115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에서 우리는 외려 영화관을 떠올린다. 생생함을 가지고 우리 눈 앞에서 펼쳐지는 장관도 실은 영사기 위에서 돌아가는 필름의 그림자에 불과하지 않은가. 오늘날 우리의 세계 체험은 미디어 (media)에 매개된 (mediated) 간접적인 것이 되었다. 세계는 자기가 직접 본 이미지가 아니라, 점점 타인이 본 것의 복제 영상으로 채워지고 있다. 

현실은 사라지고, 세계는 점점 더 가상에 가까워진다. 발자크의 말대로 현실 자체가 혹시 그림자 극이 아닐까




3. 숨바꼭질


신은 고독하지 않았을까? 이 우주에서 혼자 내기를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서 그에게는 사탄이 필요했다. 그가 만든 낙원에는 처음부터 뱀이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신은 매우 무료했을 것이다. 신은 사탄과 내기를 한다. 이 내기에서 시험대에 오르는 것은 인간들, 무엇이 참과 거짓인지 분별하기 위해 진리와 숨바꼭질을 해야한다. 진리란 무엇인가? 눈에 보이는 것, 저것이 참인가? 아니면 참은 늘 보이지 않는 것 속에 감추어져 있는 것인가?


<아나몰포시스, 왜곡의 진리>

한스 홀바인(Hans Holbein the Younger), <대사들>, 1533년


아나모르포시스 anamorphosis 왜상


134     아나모포시스의 세 가지 용도

     -종교적 진리를 전달하는 방식

     -정치 풍자

     -터부시되는 소재를 표현


장 프랑수아 니세롱 jean francois niceron

<신기한 원근법> : 아나모포시스의 이론화

실린더 거울 : 상이 원기둥 표면에 맺힘



왜상 제작의 세 가지 유형

     - 단축왜상 Optique : 특정한 각도에서만 제 모습을 드러내는 방식

     - 반사왜상 Catoptrique : 특수한 모양의 거울에 비춰야 비로소 제 형태로 돌아오는 방식

     - 굴절왜상 Dioptrique : 보석이나 프리즘을 이용해 파편처럼 흩어진 영상을 모아 하나의 이미지로 종합


139     현대에서 다시 왜상이 주목받는 이유

일의적 메시지보다 중의적 표현을 선호하는 ‘포스트모던’의 철학적 분위기와 관련

디지털 시대를 맞아 시각 매체에 대한 관심 증가

왜상은 원근법적 그림과 달리 관찰자로 하여금 적절한 각도를 찾아 눈을 움직이게 만든다. 즉, 정지된 그림을 모델로 한 전통적 지각과는 달리 움직이는 눈, 즉 현대적인 동감각을 요구한다


<인형풍경, 얼굴은 풍경이다>

인형풍경, 여인의 머리. 남부 네덜란드 화파에 속하는 화가, 16세기 후반


메 웨스트의 얼굴. 살바도르 달리. 1943년


<물구나무, 거꾸로 본 세상>


팰린드롬, 회문, Palindrome : 뒤에서 읽어도 똑같은 단어


회문+마방진


기독교 상징하는 애너그램. 신성한 철자 바꾸기 놀이. <주기도문>의 일부


앰비그램 (Ambigram)  위 아래를 뒤집어도 읽을수있는 단어


뒤집은 머리 - 교황/악마, 네덜란드 화파, 1600년경



3. 수수께끼


<애너그램>

다빈치코드의 암호, 매트릭스의 네오, 해리포터 볼드모어 

예언이나 필명


<아크로스틱, 공간이 된 시간>

삼행시. 아크로스틱 Acrostic


매조스틱 Mesoctic : 중간에 읽는 글자들을 수직으로 읽는 시

칼리그람 Calligram : 시의 주제를 시각 영상으로 표현 (십자가 형상이라던가)

보이는 것 뒤에 감추어진 신의 섭리를 표현하기 위해 쓰인 장치

형상시 Carmen figuratum 


<리버스, 그림이 된 글자>

Rebus, 수수께끼 그림

최초의 문자는 그림이었다. 하지만 의미를 나타내던 표의문자는 점차 음성을 나타내는 표음 문자로 바뀌어갔고 그 과도기에 나타나는 현상. 그림 속에서 의미와 소리가 뒤섞이게 된다


Da vinci, 거울


235      리버스에서는 그림과 문자가 뒤섞인다. 르네상스 이후 서구의 회화에서는 이미지와 텍스트가 서로 분리된다. 문자는 그림 밖으로 나가 제목이 되고, 그림은 텍스트 밖으로 나가 삽화가 된다. 문자와 그림이 하나의 화면 안에 동시에 존재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다다이스트들의 작품에서는 그림과 문자가 한 화면 안에 뒤섞여 버린다. 다다이스트들의 콜라주 역시 일종의 리버스라고 할 수 있다. 다만 다다이스트들은 고착된 질서를 무너뜨리려고 의미를 파괴하기에, 그들의 리버스는 의미없는 순수한 메시지, 해답없는 순수한 수수께끼가 된다.


237     선사시대는 ‘이미지’의 시대였다. 역사적 근대는 ‘텍스트’의 시대였다. 탈역사(Posthistoire)의 현대는 다시 ‘이미지’의 시대다. 물론 2차 이미지는 문자 없던 시절의 이미지와는 다르다. 그것은 문자를 바탕으로 한 것이어서 개념을 형상으로, 문자를 그림으로, 텍스트를 이미지로 변환한 것이다. 영상 매체의 등장과 함께 인간의 사고는 개념적인 것에서 형상적인 것으로 바뀌어가고, 스크립트 (script)나 프로그래밍(programming)처럼 텍스트를 시각화하는 기술이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다. 텍스트를 이미지로 표현하는 리버스는 이 시대가 꾸는 꿈의 원형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꿈은 한갓 몽상이 아니라 디지털 기술에 힘입어 눈앞에서 현실이 되고 있다.



4. 사라짐의 미학


<피크노렙시,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241     피크노렙시 pyknolepsie

프랑스의 미디어 이론가 폴 비릴리오 Paul Virili 는 이러한 현상을 일컫는데에 피크노렙시라는 의학 용어를 사용한다. ‘피크노’는 ‘빈번하다’는 뜻이고, ‘렙시’는 ‘의식 부재를 동반한 발작증’이라는 의미이므로, 우리말로 대충 ‘빈발성 망각증’이라 할 수 있다. 대개 어린 시절에 나타났다가 성인이 되면서 점차 없어지는 증상이라고 한다. (가령 아이들이은 자기 앞에 우유잔이 놓여 있다는 사실을 잊고, 잔을 엎지르곤 한다)

아이들에게는 세계는 연속이 아니라 단편들로 주어진다. 이때 어른들은 야단을 치거나 타일러 아이들의 머릿속에서 끊어진 필름들을 이어준다. 아이들은 이를 통해 소위 ‘자의식’이라는 것을 형성하게 된다. 이렇게 의식의 연속성이란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인위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라 한다. 

피크노렙시는 이미 우리에게 익숙해진 영상 미디어의 특성이다. 연극은 막이 일단 올라가면 다시 내릴 때까지 배우의 연기가 시간적 연속성 속에서 진행된다. 반면 영화는 컷과 컷을 이어 붙여서 만들어 진다. 시간의 흐름이 끊기고 갑자기 과거의 장면이 나오기도 하는데 이를 ‘몽타주’라고 한다. 


243     데쿠파주 decoupage

분절, 원래 영화 필름을 촬영 장소에 따라 분류해놓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한다. 촬영을 할 때에는 한 장소에서 찍어야 할 장면들은 한꺼번에 찍는다. 그래야 나중에 그 자리에 다시 올아올 필요가 없지 않은가. 시간적 순서를 바로잡는 것은 필름을 편집할 때 해도 문제가 없다. 여기에는 시간의 선형성을 파괴하는 영화 고유의 구성 원리가 담겨 있다.


250     관객에게 의미를 읽도록 요구한다는 점에서 에이젠슈테인의 충돌적 몽타주 미학은 ‘지성적 몽타주 intellectual montage’ 가 된다. 벤야민이 영화 매체가 인간들의 지각을 발달시키고, 관객의 의식을 정치적으로 각성시켜준다고 보았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러시아 혁명영화의 몽타주는 벤야민이 그 유명한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을 쓰는 밑거름이 되어주었다. 오늘날 이 논문은 모든 미디어 이론의 토대로 여겨진다. 몽타주는 영화에만 적용되는 원리가 아니다. 독일의 미학자 아도르노는 다다이즘과 초현실주의만이 아니라 현대 예술 자체가 몽타주라고 말한다. “미시적인 구조로 볼 때 새로운 예술은 모두 몽타주라고 할 수 있다."


<마술>


255     폴 비릴리오 “힘을 소유하는 것, 세계와의 놀이에서 승리하는 것. 그것은 개인 시간의 기준 잣대를 천문학적 시간의 기준틀에 일치시키지 않고 분리하는 것이다."


257     "존재의 연속성"이라는 당연한 지식도 선천적인 것이 아니라, 자라면서 후천적으로 습득한 추상적 사유의 산물이다. 자라면서 차차 사물을 시간적, 공간적 연속성 속에서 파악하는 훈련을 통해 선형적 의식을 얻게된다.



5. 순간에서 영원으로


삶은 무상하며 죽음은 영원하다. 세계는 덧없이 짧고, 영생은 죽음 뒤에 찾아온다. 신을 믿는 자들은 죽어서야 영원 속으로 들어간다. 하지만 살아서 영원 속에 들어갈 수는 없을까? 왜 없겠는가. 어린 시절 놀이를 하면서 현실의 물리학적 시간과는 다른 영원한 시간 속으로 들어가곤 했다. 신의 현현처럼 불꽃놀이에서 영원은 순간이 되고, 만화경 속을 흐르는 것은 완전히 다른 시간이다.


<불꽃놀이>


Kiyoshi Yamashita


269      T.W.아도르노

불꽃놀이는 예술의 가장 완전한 형태다. 그 영상이 최고의 완성의 순간에 보는 이의 눈앞에서 다시 사라져가기 떄문이다.


281      "순간을 향해 말하노니, 멈추어라. 너는 너무나 아름답도다.” 불꽃놀이를 볼 때면 누구나 파우스트의 심정이 된다. 꽃불들을 스러지기 직전에 하늘에 붙들어둔다면, 밤하늘은 늘 아름다울 것이다. 하지만 꽃불의 매력은 만개하는 순간에 곧바로 스러지는 데서 오는 것. 독일의 철학자 아도르노는 불꽃놀이를 현현(apparition), 즉 인간 앞에서 신이 섬광처럼 나타나는 신비 체험에 비유한다. 손으로 잡을 수 없게 섬광처럼 스쳐지나가는 것은 예술의 진리도 마찬가지. 그리하여 불꽃놀이는 그의 말대로 예쑬의 원형인지 모른다.


<만화경, 집시의 요술구슬>


284     만화경, 칼레이도스코프 Kaleidoscope

Kalos 아름다움 + Eidos 형상 + Scope 볼거리, 대칭에서 오는 아름다움


295     놀이에 열중한 아이에게 일상의 시간은 멈춘다. 놀이 속을 흐르는 것은 또 다른 시간대. 만화경도 마찬가지다. 만화경의 기둥 속에 직선으로 흐르는 기독교의 시간과는 다른 불교적 시간이 들어있다. 만화경의 구멍은 우리를 일상에서 빼내 새로운 시간 속으로 들어가게 한다. 만화경 속의 요소들은 유한하나, 그것들의 조합이 만들어내는 ‘사태’의 수는 무한하지 않은가. 저 고요한 거울의 방을 흐르는 것은 또 다른 시간, 유한의 조합으로 무한의 사태를 생성하는 영겁회귀의 시간이다.


<미로>


308     미로의 세 가지 형태

- 미혹의 여지가 없는 단방향 unicursal의 고전적 미로

- 갈림길에서 끝없이 선택을 강요받는 퍼즐형의 근대적 미로

- 입구도 출구도 없고, 입구와 출구를 잇는 유일한 해법 없이 사방으로 무한히 확산되는 리좀 rhizome형 탈근대적 미로



6. 다이달로스의 꿈


<종이접기>


325     질 들뢰즈가 지적한 것처럼, 라이프니츠는 ‘접기’를 세계의 원리로 보았다. 세계는 모래알과 같은 ‘입자’가 아니라 레스토랑의 접힌 냅킨처럼 ‘주름’으로 되어 있다.

정신의 지각은 접기다. “지각의 작동은 영혼 안에 주름들을 형성하기에 모나드(monad) 내부는 주름들로 덮여 있다.”

존재의 생성은 펼치기다. “그러나 이 주름들은 물질과 닮았는데, 이 물질은 이제 외부의 겹주름들로 조직되어야 한다.” 

인간의 정신 속으로 세계는 주릅잡혀 들어가고, 정신은 상사의 원리에 따라 물질 위에 겹주름을 실현하며 자신의 잠재성을 펼쳐나간다. 안쪽으로 주름과 바깥의 겹주름은 서로 포개지며, 내재(안)과 초월(밖)이라는 전통적 이분법을 슬쩍 비껴나간다.


미술관 접기 :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최소연, 2003년


<오토마타, 인형의 꿈>


348     현대인에게 오토마타는 더 이상 하릴없는 장난감이 아니다. 오늘날 그것은 예술(키네틱 아트)이요, 과학(사이버네틱스)이요, 생산력 (로보틱스)이다. 기계는 점점 자연스러워져 인간을 닮아간다. 탱글리의 기계는 심지어 작품을 창조하기까지 한다. 반면 인간은 점점 기계화하여 인형을 닮아간다. 미래파 예술가들은 인간 신체의 금속화를 꿈꾸었고, 다다이스트들도 현대인의 신체를 기계로 표현하 바 있다. 안드로이드(android)와 사이보그(cyborg)는 서로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접근하다가 언젠가는 서로 접속하게 될 것이다. 로봇 속에서 마술과 예술과 기술은 하나가 된다. 하긴, 날개를 만들어 하늘을 날았던 다이달로스는 마술사이자 예술가이자 기술자가 아니었던가.


<정리정돈, 카오스 속의 코스모스>


우르주스 베얼리


360     노동이 유희가 되는게 바로 카를 마르크스가 꿈꾸던 이상 사회가 아니었던가. 그 사회로 가기 위해 꼭 혁명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항상은 아니더라도 아주 가끔은,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을 바꾸는 것만으로 노동이 유희가 되는 세상으로 날아갈 수 있다.

이제까지 철학자들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세계를 어지럽혔을 뿐이다. 문제는 그것을 정돈하는 것이다.



364     미디어 이론에서는 선형적 글쓰기와 더불어 직선사관, 즉 시원과 종말을 갖는 ‘역사’의 관념이 생겼다고 본다. ‘역사’ 이후의 탈근대의 시간은 이와 달리 처음과 끝이 없는 순환의 시간이다. 빠져나올 수 없는 텍스트의 미로를 돌며 연상의 놀이를 할 때, 천문학적 시간과는 다른 순환적 시간, 즉 영겁회귀의 시간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366     하나의 요소가 동시에 다른 의미를 갖는 것, 중의성 혹은 다의성이 단이미(monosemie)즉 명석 판명함이라는 근대의인식 이상과는 다른 탈 근대적 이미지. 탈역사의 글쓰기의 특징이다.


367     상상력은 상투적인 질서를 벗어나 자유롭게 유희한다. 상상력의 노마돌로지는 갑작스런 깨달음, 즉 직관의 모나돌로지로 이어진다. ‘모나드’는 개별자이면서 각자 그 안에 온 우주를 담고 있다. 과거에는 수많은 개별자들을 추상하여 보편자로 상승하는 것이 진리였따. 오늘날에는 각각의 개별적 형상 속에서 보편자를 직관하고, 보편적 인식을 개별적 형상으로 압축하는 능력이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