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이트/책 2015. 1. 26. 01:15

[책] 정재승+진중권, 크로스 2





<발췌>

1. 로또

     랜덤워크 random walk : 수학, 컴퓨터 과학, 물리학 분야에서 임의 방향으로 향하는 연속적인 걸음을 나타내는 개념이다. 일례로, 액체나 기체 속에서 움직이는 분자의 추적 경로

     범주 오류 category mistake : 논리적으로 다른 범주에 속하는 말들을 같은 범주에 속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오류로 영국의 분석철학자인 라일이 처음 사용한 말이다. 예를 들면, 옥스퍼드를 방문한 사람이 여러 단과대학 college, 도서관, 경기장, 박물관 등을 구경하고 나서 “그런데 대학교 university는 어디 있죠?”라고 묻는 경우 그 사람은 범주오류를 범한 셈이 된다. 왜냐하면 ‘대학교’는 그 사람이 구경한 여러 가지 기관들이 조직되어 있는 전체를 말하는 것으로, 단과대학, 도서관 등과 병치되는 기관이 아니라 이것들을 포함하는 상위 개념이기 때문이다.

     초기 컴퓨터 예술은 마르코프 체인 (시간에 따른 시스템 상태의 변화. 매 시간마다 시스템은 상태를 바꾸거나 같은 상태를 유지한다)과 몬테카르로 법(물리적, 수학적 시스템의 행동을 시뮬레이션 하기 위한 계산 알고리즘, 통계학적이고, 일반적으로 무작위의 숫자를 사용한 비결정적인 방법) 을 사용했다. 먼저 마르코프 체인을 이용해 인간이 만든 음악에서 음렬의 속박 확률을 구한 뒤 몬테카를로 법으로 얻어진 확률분포에 따라 새로운 음렬을 생성해내는 식이다. 이 경우 컴퓨터가 생성한 음악은 확률분포의 동일성을 통해 인간이 만든 음악에 어느 정도 근접하게 된다. 당첨번호를 생성하는 방법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문제는, 인간의 음악작품은 ‘정보’를 가진 구조물 neg-entropy인 반면, 로또의 당첨번호는 애초에 ‘정보’가 없는 entropy 수열에 불과하다는 데 있다. 로또의 당첨정보는 ‘정보’가 아니다. 당첨번호 속에서 각 숫자의 발생 확률에 차이가 나는 것은 일시적 현상일 뿐, 추첨이 반복적으로 이루어질수록 그 차이는 점점 사라져갈 것이다. 엔트로피 증가에 의한 당첨번호의 열사



2. 오디션 _ 경쟁사회의 공포조차 오락의 대상으로

     네덜란드 역사가 하위징아가 지적하듯이 인간에게는 ‘유희 본능’이 있다. 그리하여 굳이 삶이 강요하지 않아도 인간들은 무료함을 쫓으려고 경쟁을 즐기곤 한다. 물론 ‘놀이’로 행해지는 이 경쟁은 진짜가 아니라 허구에 불과하다. 허구라 해서 진지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남미의 어느 두 나라는 놀이를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여 축구경기가 끝난 뒤 서로 전쟁을 벌였다. 반면 놀이를 너무 하릴없이 받아들이면 아예 재미가 없어진다. 놀이의 진정한 적은 상대가 아니라 ‘쓸데없다’는 말로 ‘놀이의 분위기를 깨는자 Spielverderber’다.

     오늘날 ‘놀이’는 차고 넘친다. 오락들의 경쟁 속에서 살아남으려면 놀이의 몰입도를, 말하자면 놀이에 동반되는 진지함과 긴장감의 수준을 높여야 한다. 놀이는 현실에 가까울수록 진지해진다. 수많은 놀이에 익숙해져 웬만한 놀이에 만족하지 못하는 대중을 만족시키려면 놀이를 가능한 한, 현실에 가깝게 가져가야 한다. 오디션이라는 게임은 이 필요성에서 탄생했을 것이다. 다른 게임과 달리 오디션은 현실과 허구가 구별되지 않는 지점에 서 있다. 그 안에서는 현실과 똑같이 경쟁이 일어난다.

미디어 이론의 관점에서 보면 오디션프로그램은 올드미디어가 뉴미디어를 재매개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치열한 경쟁 속에 살아남는것이 컴퓨터 게임에서 즐겨 사용되는 서사 중 하나라면 오디션은 대중에게 익숙한 이 오락의 문법을 방송에서 차용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따라서 그것은 현실과 허구의 존재론적 융합이자, 동시에 방송과 게임이라는 매체의 융합이기도 하다. 이 이중의 융합을 통해 오디션은 경쟁사회의 심리적 압박, 그 스트레스를 오락으로 바꾸어 향유의 대상으로 제공한다.

고대 그리스. 고대 인들은 현실과 허구를 그렇게 분명하게 구별하지 못했다고 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연민은 그저 주인공이 불쌍하다는 수준을 넘어 그의 운명이 곧 내 것이 될 수 있다는 느낌에 가까웠다. 그가 말한 공포 역시 영화를 보는 우리의 것보다 훨씬 강력해 거의 경악에 가까웠다. 

그리스 비극의 심리적 바탕이 된 것은 아마 ‘운명’ 에 대한 두려움이었을 것이다. 미래의 불확실성에서 오는 이 두려움을 그리스인들은 비극을 통해 해소했다. 영웅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을 통해 ‘연민’을 느끼고 그의 몰락에 ‘공포’를 느끼는 가운데 그들은 ‘운명’이 주는 심리적 압박을 배설(카타르시스)했던 것이다.

다윈의 진화론 중 성선택 sexual selection. 자신이 생물학적으로 뛰어난 형질을 가지고 있으며, 그래서 가족 부양 능력이 출중함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동물들은 자주 행동하는데 그것이 이성에게 매우 매력적으로 보여서 짝짓기에도 유리하고, 덕분에 다음 세대에 자신의 유전자를 전할 가능성도 높아진다는 것. 다윈은 성적 에너지가 왕성한 데 비해 그것을 충분히 발산하고 표현하지 못해 ‘승화’시킨 것이 예술이라고 주장한 프로이트는 틀렸고, “인류가 살아있는 한, 에로티시즘은 예술의 원천으로 존재한다”며 섹스 에너지가 예술 창작의 원동력이라고 믿은 장 콕토는 옮다고 손을 들어준 셈. 진화심리학은 우리가 이토록 열정적으로 음악을 즐기는 이유를 성선택 이론으로 설명한다.



3. 자살 _금기인가, 인간만의 권리인가 / 자신을 수단으로 전락시키는 행위인가, 아니면 생의 완성인가



4. 키스 _ 천국의 언어가 아직도 남아 있다면

키스는 신과 동물이라는 이중의 ‘기원’을 가지며, 또한 신성과 성애라는 이중의 ‘의미’를 갖는다. 신화와 설화에서 키스는 ‘생령’을 들이마시거나 불어넣는 행위였다. 하지만 진화론적 설명에 따르면 입키스는 새끼에게 먹이를 주는 행위에서 유래했다.

사랑하는 여인과 키스를 하면 3분도 3초처럼 짧게 느껴지지만 난로 위에 손을 얹어 놓으면 3초도 3분처럼 길다. 아인슈타인이 설명하는 상대성 이론.



5. 트랜스포머 _ 육체를 바꿀 수 없는 인간들의 욕망

     고대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에 따르면 만물은 유전한다. 이 때문에 우리는 같은 강에 두 번 몸을 담글 수 없다. ‘변형’은 특별한 현상이 아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형태를 바꾸기 떄문이다. 우주도 탄생 이후 변형되어왔고, 지구도 그위에 사는 나도 달라져있다. 물론 <트랜스포머>의 ‘변형’은 일반적 의미의 만물 유전을 말하는게 아니다.
우리의 맥락에서 관심을 끄는 것은 역시 한 형태가 완전히 다른 형태로 바뀌는 급진적 변형이다. 자연 속에는 그런 놀라운 변형의 예가 존재한다. 가령 곤충의 ‘변태’나 달걀의 부화, 새끼 고슴도치의 등이 태어난지 몇시간 만에 새까만 가시로 뒤덮이는 모습 등.
동일한 사물이 형태만 바꾸는 것이 ‘변형 transformation’이라면 한 사물이 완전히 다른 사물로 둔갑하는 것은 ‘변신 metamorphosis’이다. 변신은 마법과 신화의 영역에 속한다. 가령 해리포터는 마법의 지팡이로 한 사물을 완전히 다른 사물로 바꾼다. 그리스 신화에서 신은 종종 동물로 둔갑하고 인간은 종종 식물로 변신한다. 특히 아폴론의 연애 행각은 종종 연인의 죽음이라는 비극적 결말로 끝나는데, 그때마다 그는 죽은 연인을 식물로 둔갑시키곤 한다. ‘아폴론의 연애 행각이 없었다면 오늘날 식물도감은 매우 빈약했을 것이다.'

     ‘변형’의 모티브는 디자인에서도 중요한 영감의 원천이 된다.
     변형 디자인에는 크게 세 가지 원칙이 있다고 한다.
     첫째, ‘재분재 re-distribution’는 사물이 이루는 요소들의 물리적 배치를 바꾸는 것이다. 가령 펼치면 침대가 되는 소파. 사물의 형태와 기능이 바뀐다.
     둘째, ‘재정향 re-orientation’사물의 위치를 바꾸는 것. 벽에 세워져 있다고 당기면 내려오는 침대. 사물의 형태와 기능은 변하지 않는다.
     셋째, ‘통합 integration’언 외부 요소를 첨가해 해당 사물의 형태와 기능을 바꾸는 것

     <트랜스포머>에 등장하는 오토봇과 디셉티콘은 변형 디자인의 ‘재분배’원칙을 사용하고 있음. 영화 제작자들은 그들의 디자인 속에 타당한 물리학을 구현하여 로봇의 크기가 그것이 변장한 형태(자동차)에 조응하게 만들었다. 위상학적으로는 해답을 제시하지 못했다. 설사 미래에 그와 같은 변형 기술이 개발된다 해도 그것은 영화에서처럼 기계공학적 방식이 아닌 후기 생물학적 방식을 택할 것이다. 애벌레는 완벽하게 잠자리의 성체로 변태를 하지 않던가.



6. 라디오 _ 선전 선동 도구에서 학창시절의 추억까지, 현대에도 이어지는 따뜻한 구술 문화

라디오를 보고 있노라면 세상의 모든 기술은 제자리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수많은 기술들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요즘, 결국 살아남는 것은 우리 곁에서 우리 삶을 더욱 인간적이고 풍요롭게 해주는 기술들이다



7. 학교짱 _ 수컷들의 세계는 어디에서 시작되었나

불안과 열패가 불러온 야만과 폭력
덜 자란 어른들이 만들어내는 폭력의 맹아



9. 육식 _ 끊을 수 없는 ‘남의 살’에 대한 갈망

영국의 작가 존 버거는 <왜 동물을 보는가?>라는 에세이에서 인간은 동물과 접촉하지 않게 되면서, 특히 눈과 눈을 서로 들여다보지 않게 되면서 동물들과 잔인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에 다르면 서구에서도 산업화와 더불어 육류 소비가 급증했다고 한다. 소득이 늘자 노동계급까지도 대거 고기 소비에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때쯤 상류층은 고기의 폭식에서 벗어나 열량이 적은 가벼운 식단으로 바꾸기 시작한다. 물론 이는 양 적고 질 좋은 음식을 통해 자신들을 하류계층과 차별화하려는 일종의 기호학적 행위다. 고기가 사회적 기호의 기능을 상실하자 외려 채식이 고급스러운 식문화로 부각되고, 육식은 노동계급적인 식단으로 여겨지기 시작한다.

인류가 채식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주장에는 크게 네 가지 근거가 있다. 인간의 건강, 동물의 권리, 식량의 배분, 생태의 보존



11. 낙서

호모 텔레포니쿠스 Homo telephonicus 들은 왜 전화 통화를 할 때 낙서를 즐기게 되었을까? 이 낡은 질문에 최근 흥미로운 대답을 찾아낸 사람들은 신경과학자들이다. 우리 뇌는 도형이나 패턴 같은 영역을 담당하는 부분과 언어를 담당하는 부분이 평소 활동량이 높은데, 전화 통화를 하는 동안에는 온통 언어 영역만 활성화되다보니 도형과 패턴을 담당하는 뇌 영역이 심심해져 기하학 문양이나 사람 얼굴을 그리는 것이라고 한다.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뇌활성화의 균형을 유지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상대방의 얼굴은 보지 못한 채 목소리만 들으려니 시각정보에 대한 균형을 맞추려고 낙서를 한다는 주장이다.



13. 트위터

되도록 자신을 많이 복제해 널리 확산시키고 싶어 하는 게 유전자의 본능이다. 문화에도 유전자처럼 복제 기능을 가진 “밈”이라는 유전자가 있다는 이론 (이라기보다는 은유)이 있다. 트위터의 멘트는 이 밈을 닮았다. 하지만 본능이 항상 이성적인 것은 아니다. 

밈 meme : 유전자처럼 개체의 기억에 저장되거나 다른 개체의 기억으로 복제될 수 있다는 문화의 전달 단위로 영국의 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의 저서 <이기적 유전자>에 소개된 용어. 문화의 전달에도 유전자처럼 중간 매개물이 필요한데, 이 역할을 하는 정보의 단위가 밈



15. 케이팝 

사회 집단에 동조하려는 성향은 대뇌에서 그대로 나타났다. 처음에 아무 정보 없이 노래를 들었을 때 쾌락의 중추인 ‘미상핵’이 활성화되었다. 반면 인기 순위를 알고 난 뒤 노래를 들을 때는 선호도는 올라갔지만 미상핵의 활동이 늘어나진 않았다. 오히려 고통이나 역겨움을 표상하는 ‘섬피질’이 활성화되었는데, 노래에 대한 대중의 인기가 자신의 취향과 다를수록 그만큼 ‘대중의 선호에 따라야 한다’는 감정적 부담이 커지기 떄문에 10대이 뇌 안에서 고통과 관련된 섬피질이 활성화된 것이다.



16. 나는 꼼수다

매클루언은 전자매체와 더불어 ‘구텐베르크 은하’가 종언을 고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나꼼수는 이 새로운 전자 구술 문화의 디지털 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나꼼수의 이른바 ‘발랄함’과 ‘분방함’은 이 매체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말과 글은 다르다. 말로 전달되는 정보는 강하게 구술문화의 성격을 띤다. 구술문화에서는 로고스 logos 보다는 뮈토스 mythos 가 중요하다. 즉 상황의 객관적 기술보다는 허구가 뒤섞인 이야기, 냉철한 논리의 정합성보다는 뜨거운 정서적 공감대가 더 잘 어울린다.



19. 4대강

각하의 미감을 파악하려면 자연미와 예술미(인공미)의 관계에 관한 18세기 미학 논쟁으로 돌아가야 한다. 당시에 낭만주의자들은 자연미를 예술미 위에 올려놓았다. 가령 칸트에게 자연은 인공의 모범, 위대한 예술은 자연처럼 보여야 한다. 실제로 독일 낭만주의자들의 작품 속에서는 마치 자연이 살아서 꿈틀거리는 것처럼 느껴진다. 낭만주의적 관념 속에서 인간은 대자연에 포섭된 미약한 존재일 뿐이다.
반면 헤겔과 같은 고전주의자들은 예술미의 우월함을 믿었다. 왜 예술이 필요한가? 헤겔에 따르면 그것은 자연의 결함 때문이다. 자연은 불완전하기에 그것을 인공미 (예술)로 완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헤겔의 생각은 근대 개발주의 이데올로기의 미학적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자연을 인간(의 필요)에 뜯어 맞춰라. 카를 마르크스까지도 이 이데올로기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자연이 인간화. 그것이 진보다'
산업혁명은 개발 이데올로기의 기술적 실현이었다. 이후 자연은 정복의 대상이 되었다. 자연은 무엇인가? 그것은 ‘자원의 보고’, 즉 마음대로 꺼내다 쓸 수 있는 자원의 창고다. 존재하는 것은 그저, 자연을 착취해 얻은 결과물을 ‘사적으로 분배하느냐’, ‘사회적으로 분배하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20세기 초 독일 사민당의 강령 한 구절. “자연은 공짜로 존재한다."
이것이 헤겔의 ‘주객동일성’ 원리의 현실적 함의다. 주체(인가)와 객체(자연)의 동일성을 추구한다는 것은 곧 자연에서 오직 인간의 필요에 적합한 것만 본다는 걸 의미한다. 가령 A와 B를 잇는 최단 코스는 직선이라는 명제에 따라 숲을 가로질러 도로를 건설하면 숲의 생명은 끊어지고 동물들의 생태계가 파괴된다.
이로써 자연의 진짜 자연스러운 모습은 간단히 파괴된다. 물론 개발을 통해 우리는 자연의 위협에서 벗어나 발전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결과 이제는 거꾸로 인간이 자연을 위협하게 되었다. 한동안 인간들은 자신도 자연에 속한 존재라는 것을 망각하고 살 수 있었다. 하지만 자연의 복수가 인간의 생체에 미치기 시작하자 이 미친 개발주의의 무덤에서 서서히 생태주의 의식이 자라났다.
 이 변화는 서구사회가 산업사회에서 산업 이후 사회로 이행하는 시점에 발생했다. 산업사회의 목표가 자연력을 인공력으로 바꾸어놓는데 있었다면 산업 이후 사회에서는 외려 인공력으로 자연을 모방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가 된다. 미메틱 (mimetic, 재현적, 모방적) 테크놀로지야말로 산업 이후의 새로운 기술의 상징이다.
인터페이스의 관점에서 접근해보자. 가령 산업혁명의 인터페이스는 기계에 인간의 신체를 뜯어 맞춘다. 한마디로 인간이라는 생명체마저 기계로 바꾸어놓는 셈이다. 그러다보니 노동자들에게는 군대식 규율이 요구되었다. 
정보 혁명의 시기에는 역전이 일어난다. 디지털 인터페이스의 목표는 생체를 기계에 맞추는 게 아니라 기계를 생체에 맞추는 데 있다. 최근 유행하는 디지로그라는 말은 이 생체친화적 기술의 다른 이름일 것이다. 디지털은 순수 수학적 (0, 1) 기술이나, 우리는 그것을 이용한 장치를 거의 아날로그 세계의 대상처럼 다룰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이 ‘자연의 인간화’에 대립되는 ‘기계의 생체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