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이트/책 2015. 1. 25. 03:17

[책] 정재승+진중권, 크로스 1





  • <발췌>
이 책의 의도는 동일한 사안을 놓고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시각을 교차시켜, 거기서 확인되는 편차를 통해 사물을 더 깊이 이해하자는 데 있었다. 이 컨셉 자체가 현실의 층위에 정보의 층위가 겹쳐지고, 예술과 과학/기술의 경계가 흐려져 하나로 융합되는 시대를 반영할 것이다. 이 책은 ‘디지털 생활 세계의 현상학’을 구축하기 위한 첫걸음이다.

1. 스타벅스 _ 입맛으로 나, 우리, 그들을 구별하는 세상

     취미, 취향 이라는 낱말은 글자 그대로 입맛 taste를 뜻했다. 이 낱말이 이성중심주의 문화 속에서 시각과 청각의 섬세함으로, 지각 능력으로 전의된 것이다. 노르베르트 엘리아스는 감각의 섬세화를 문명화 과정, 특히 궁정화의 산물로 설명한다. 폭식과 폭음을 일삼던 중세의 호전적 전사들이 궁정에서 귀족으로 변신하는 과정에서 점차 취향의 섬세함을 평가하게 됐다는 것이다. 이 세련된 궁정 취향은 훗날 시민계급에 받아들여지고, 민주주의와 시장주의의 확산을 통해 일반 시민들에게까지 퍼진다.

     스타벅스는 커피의 입맛 taste를 하나이 미학적 취향 taste로 바꿔놓았다. 커피잔과 아이템 위에 새겨진 로고는 그것을 소유한 이가 어떤 ‘취향 공동체’의 일원이라고 말해준다. 일종의 ‘종족화’현상이랄까.

     상품을 통해 특정 계층에 속한다는 사실을 과시하는 것을 장 보드리야르는 ‘파노플리 효과’라고 불렀다. 피에르 부르디외라면 이를 계급적 차이를 드러내기 위한 ‘구별 짓기’로 설명할지 모르겠다. 시뮬라시옹의 세계에서는 허구 자체가 세계가 되는 법. 허구로서의 커피, 서사로서의 커피가 오늘날에는 이미 에스프레소의 진한 액체만큼 진한 물질적 현실이다.

     대중은 상품과 상품 사이의 ‘차이’를 소비한다. 중요한 것은 사용가치가 아니라 기호가치다. 생산과 소비의 물질적 모델은 산업사회에 속하는 것. 그것에 대한 정보사회의 모델은 비물질화 혹은 재물질화, 다시 말해 물질이 아닌 브랜드 그 자체, 혹은 물질의 디자인과 결합된 브랜드일 것이다. 스타벅스는 취미를 선사하고 전달하고 창조하는 문화적 매체다. 오늘날 기업은 취미로 묶인 상상의 공동체를 수신자로 갖는 미디어가 됐다.

     파노플리 효과 : 파노플리란 ‘집합’이란 뜻으로, 판지에 붙어 있는 경찰관 놀이 장난감 세트처럼 ‘동일한 맥락의 의미를 가진 상품의 집단’을 말한다. 어린아이가 경찰관 놀이세트를 사용하면 마치 경찰관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낀다. 마찬가지로 파노플리를 이루는 상품을 소비하면 그것을 소비할 것이라고 여겨지는 집단에 소속한다는 환상을 주는 것

     맥도널드 가게의 로고를 보여주면 뇌 영역중 ‘고통과 불쾌’를 표상하는 인슐라가 활성화되지만, 스타벅스 로고를 보여주면,, 즐거움의 중추와 브랜드의 가치를 음미하는 전전두엽이 활성화 되기 시작한다.



2. 스티브잡스 _ 디지털 세상, 어떤 사람이 구루가 되는가

현실왜곡장 : 마치 물리학 용어처럼 보이지만 사실 스티브잡스를 위해 만들어진 말이다. 잡스가 보여주는 현실왜곡장의 대표적 효과는 잡스 근처에 가면 모든 현실이 왜곡되어 보인다는 것이다. 잡스 옆에서 그가 하는 말을 듣고 있으면 평소에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던 일들을 자신도 모르게 믿게 된다. 잡스의 현실왜곡장은 잡스를 중심으로 형성되며 중심으로부터 거리가 멀수록 그 힘이 약해지기 때문에, 보통의 경우는 사람들이 한번 현실왜곡장에 들어갔더라도 잡스에게서 거리가 멀어지면 제정신으로 돌아온다고 한다.



3. 구글_ 검색을 잘하면 지능도 발달할까

     기계 검색이 열어주는 새로운 인식론적 의미를 인식해야한다. 흔히 우리는, 정보는 해독이 중요하고 검색은 부차적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정보가 희귀하던 시절의 낣은 습관인지도 모른다. 정보의 홍수 시대에는 해독하는 능력보다는 범람하는 정보 속에서 자기가 필요로 하는 정보에 성공적으로 접근하는 능력이다. 그런 의미에서 검색엔진은 정보의 바다에 떠 있는 구명보트라 할 수 있다.
기계검색은 정보를 생산하는 방식 역시 변화시킨다. 모던예술가들은 일찍이 “새로움은 요소가 아니라 배체이 있다”라고 말한 바 있다. 중요한 것은 새로운 정보를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정보들을 새로운 방식으로 조직하는 것이다.

     디지털 시대의 기계적 영감. 구글에 들어가 검색창에 낱말을 타이핑하면, 단지 그 낱말이 포함되어 있다는 단순한 이유에서 이제까지 생각지도 못했던 수많은 텍스트가 화면에 나타날 것이다. 기계가 전혀 엉뚱한 자료를 내밀 때, 인간은 본의 아니게 자신이 상상할 수 있는 한계 밖에 존재하는 정보를 접하게 되기 때문이다. ‘영감’이란 인간이 합리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범위의 바깥에서 불현듯 사건처럼 찾아오는 어떤 것이다.



4. 마이너리티 리포트_ 미래를 예측한다는 위험한 욕망

     제작에 들어가기 몇 년 전에 스필버그 감독은 2054년의 사회가 어떻게 될지 상상하기 위해 도시 계획자, 기술 혁신자, MIT 연구원들을 포함한 다양한 분야의 미래 예측가들이 사흘에 걸친 회의를 열었다고 한다. 1930-40년대의 SF가 과학작들의 캐리커처만 그리느라 그 안에 진짜 과학적 정보는 들어있지 않았다면, 마이너리티 리포트는 기술의 현재와 미래에 대한 현실적 예측에 기초한 ‘기술적 상상’의 구현이라 할 수 있다. 

     오스트레일리아의 미디어 아티스트 제프리 쇼는 ‘그동안 컴퓨터 기술의 발전에서 예술가들의 역할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라고 말한다. 오늘날 대중화된 인터페이스의 상당수가 실은 미디어 아티스트들의 실험에서 영감을 얻은 것들이다. 문학의 역할 역시 빼 놓을 수 없다. 언더코플러는 말한다. “지난 10년간의 ‘사이버’연구는 그보다 10년 앞서 유행했던 사이버펑크 문학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5.  제프리 쇼_ 캔버스 위 예술가와 실험실의 과학자 사이

     ‘신체에서 벗어나는 체험 disembodiment’을 넘어 ‘다시 신체로 들어오는 체험 reembodiment’을 지향하는 파타피지컬 한 세계

     제프리 쇼의 미학적 측면을 적절히 기술해주는 것은 마르셸 뒤샹에게서 빌려오는 ‘초박막 infra-mince’이라는 개념일 것이다. 그는 초박막을 가상과 현실 사이에 존재하는 일종의 관념적 공간인 제 3의 공간으로 규정한다. 

     가상과 현실을 오가며 사는 현대인은 제프리 쇼의 말대로 ‘파타피지컬 한 종 pataphysical species’이 될 것이다. ‘파타피직'은 프랑스 작가 알프레드 자리 Alfred Jarry가 사용한 신조어로, 거칠게 우리말로 옮기면 ‘사이비 물리학’이라 할 수 있다. 현실과 가상이 어지럽게 뒤섞인 세계의 상태를 가리킬 수도 있고, 과학과 은유가 어지럽게 뒤섞인 의식의 상태를 가리킬 수도 있다. 오늘날 우리는 어차피 공상과학이 된 현실 속에 살고 있지 않은가.
    
     파타피직은 은유 metaphor 대신에 파타포 pataphor를 사용한다. 예를 들어 치열한 싸움이 벌어지는 전쟁터가 물리적 현실이고 장기판이 그 물리적 현실의 시뮬레이션, 즉 전쟁터의 은유라면, 파타피지컬 한 상태는 장기판 위에서 말이 움직이는게 아니라 정말로 인간 병사들이 움직이는 상황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해리포터의 체스판 장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체스판)



7. 헬로키티_다음 세기에도 사랑받을 그녀들의 분홍 고양이

     사람들은 얼굴을 보며 상대의 감정 상태를 잘 읽어내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주로 눈을 관찰하면서 감정을 읽어내고 있었다. 하지만 편도체가 망가진 사람은 얼굴 표정에서 눈을 제대로 보지 않고 코와 입을 주로 보며 감정을 제대로 읽어내지 못했다.
     
     흰자위 없이 까만 눈동자만 있는 아무런 감정을 표현하지 않는 키티의 눈에 사람들은 자신의 감정을 투영해 다양하게 감정을 읽는다. 

     키티는 입이 없어서 우리에게 어떤 말도 하지 않는다. 그 마음을 도무지 알수가 없어 신비로운 뿐이다. 키티로 온 방을 채우고도 그 마음을 알 수 없기에, 동일시하기 힘들기에, 키티라가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8. 셀카 _ 기술은 끊임없이 자아도취를 향한다

     기술이 인간을 바꾸는 유용한 예, 그러나 셀카카 ‘정직한 삶의 기록’이 될 수 없는 이유
     
     내가 찍는데도 (혹은 내 가장 가까이에서 찍는데도), 나의 진짜 모습이 아니라 ‘가장 왜곡된 모습’을 담아낸다는 점에서 셀카는 ‘삶의 기록’이 아니라 ‘욕망의 기록’이다

     아날로그 시대에 카메라 기능이 다분히 ‘집단적’이었다면, 주머니 속에 들어가는 폰카나 디카의 기능은 지극히 ‘개인적’이다. 이것이 카메라에 찍히는 제재의 성격도 규정한다. 즉, 특별한 계기에 동원되는 아날로그 사진의 제재가 다분히 ‘공식적’이라면, 특별한 일 없어도 늘 휴대하고 다니는 폰카의 제재는 지극히 ‘일상적’이다.

     셀카의 미학 1) 메모리 - 부족한 메모리는 얼굴에서 잡다한 결함을 지워버린다. 한정된 메모리가 인물의 이상화에 필요한 추상 역할을 해주는 것 2) 퍼스펙티브 - 얼짱각도, 3차원 공간을 차지하는 물체를 2차원의 평면 이미지로 번역할 때, 거기에는 이론적으로 무한수의 각도가 존재한다. 맘에 드는 하나를 뽑아낸다는 의미에서 역시 미적 이상화를 위한 추상 3) 이미지 프로세싱 - 형태를 변형시키는 고전주의 노선, 색채나 조명을 조작하는 바로크 노선

     그리스인들이 신을 닮으려 했다면, 현대의 대중은 스타를 닮으려 한다. 셀카는 불완전한 현실의 여체들로부터 완전한 아프로디테의 형상을 추출하던 페이디아스의 조각칼이다.

     발터 벤야민은 그의 유명한 논문에서 ‘자기를 연출하는 소비에트의 대중’에 대해 얘기한 바 있다. 사진과 영화라는 복제기술이 인민대중으로 하여금 예술 작품의 영웅(=주인공)이 될 수 있게 해주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그는 대중 매체에서 신분제를 깨뜨리는 사회주의적 평등주의의 가능성을 보았다. 하지만 그의 기대와 반대로 그의 꿈은 외려 자본주의적 방식으로 실현된 듯하다. 영화로 자기를 연출하던 사회주의적 대중은 오늘날 셀카로 자신을 연출하는 자본주의적 대중이 됐다.



9. 쌍꺼풀 수술_ 왜 눈 위의 작은 선 하나가 그토록 중요한가

     사회적 온전한 성원이 되고자 눈두덩에 받는 할례



11. 안젤리나 졸리_ 아름다움도, 도덕도 스스로 창조하라

     미덕, 악덕 상관없이 개별자의 절대적 자유를 가지고 더 높은 사회적 윤리에 자발적으로 복종한다. 졸리는 형해화한 기존 도덕을 따르는게 아니라, 자신의 도덕을 자기 스스로 만들어나간다.



13. 몰래카메라_ 나는 모든 것을 다 보고 싶다

     어디든 있으나 어디에도 없는 신의 눈, 신의 역할을 넘겨 받은 유비쿼터스, 범법 행위를 합법적 오락으로 만드는 관음증의 도구

     시선의 권리, 시선의 권력 : 자크 데리다 혹은 폴 비릴리오의 ‘시선의 권리’를 우리는 ‘시선의 권력’이라는 표현으로 바꿔놓을 수 있을 것이다. 상대에 대한 시야를 확보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그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하는 것을 의미한다. 국가는 왜 도처에 카메라를 깔아놓으려 할까? 그것은 자신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게 존재한다는 것을 참지 못하는 것이 권력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권력을 행사하려면, 그 대상에 대한 시야를 확보해야 한다. 그러므로 카메라 렌즈로 누군가를 포착한다는 것은 법적, 정치적 의미에서 그를 체포하는 것이기도 하다.

     요즘 몰래카메라를 사용하는 과학자들의 최대 화두는 ‘카메라에 담긴 영상’을 통해 인간의 행동, 언어적/비언어적 커뮤니케이션을 어떻게 자동적으로 정량화할까 하는 것이다. 



14. 개그콘서트_ 웃음, 열등한 이들의 또 다른 존재 증명

     우리에게 웃음은 ‘유머에 대한 생리적 반응’이 아니라 ‘인간관계를 돈독하게 해주는 사회적 신호’라는 메시지를 전해준다. 친하거나 호감이 가는 상대와 대화를 나누는 것이 즐거워 웃는 것이지, 농담을 주고받아야만 웃음이 터지는 것은 아니다.

     과학자들은 반전을 ‘모순 이론’으로 설명한다. 논리적으로 쉽게 연결되지 않거나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이 벌어질 때 사람들은 갈등 (혹은 모순 incongruity)을 경험하고, 그것이 해소 resolution되면서 웃음을 터뜨린다는 것이다.

     미국 심리학자 피터 더크 박사는 ‘반전 개그’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과정이 지능 발달에 매우 유용하다고 주장한다. 예상치 못한 결말이 전체 이야기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는 이 짧은 반전의 순간에 뇌에서는 복잡한 정보 처리 과정이 일어나며, 창의력처럼 고등한 사고 과정을 담당하는 뇌 영역이 활발히 활동한다는 것이다.

     희극은 플롯이 시간축을 따라 인과적으로 전개된다. 스탠딩 코미디는 이미 20세기 예술에 나타난 서사의 파괴가 대중 문화의 현상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중요한 것은 서사의 시간적 전개의 끝에 찾아오는 급전의 깨달음이 아니라, 순간순간 터져 나오는 이미지의 전복, 뉘앙스의 일탈, 의미의 전환이다. 텍스트는 시간적으로 전개되나, 이미지는 공간적으로 제시된다. 문자문화의 끝 자락을 입은 구세대는 코미디에서 플롯의 시간적 전개와 반전을 기대하지만, 이미 영상 문화의 홍수 속에 사는 신세대는 플롯이 흐르지 않는 영원한 현재 속에서 순간마다 튀어나오는 이미지의 돌발을 즐기려 한다.



16. 세컨드 라이프 _ 그곳에서는 정말 다른 인생이 가능할까

     세컨드라이프 해방군 사건에 대한 격렬한 논쟁의 주요 흐름
     좌파의 시각 : 사이버 공간에 기업의 돈이 들어와서 문제가 생겼다
     우파의 시각 : 사이버 공간에 테러리스트들이 들어와서 문제가 생겼다
     자연주의자의 시각 : 사이버 공간에 인간이 들어와서 문제가 생겼다

     세컨드 라이프를 드나들며 우리는 신체화와 탈신체화를 번갈아 체험한다. 그것은 어떤 의에서 영적 체험을 세속화한 것이기도 하다

     현실의 세계는 하나이지만, 가상의 세계는 여럿일 수 있다. 영국의 미디어 이론가 로이 애스콧은 세 개의 VR에 대해 이야기한다.
          물리적 법칙이 작용하는 검증현실 Validated Reality
          디지털 테크놀로지가 만들어내는 가상현실 Virtual Reality
          식물의 환각 작용을 이용해 입장할 수 있는 식물현실 Vegetable Reality
     애스콧은 이제 인류는 물리적 신체와 가상적 신체와 환각적 신체를 갈아입으며 한 세계에서 다른 세계, 거기서 또 다른 세계로 자유로이 넘나들 수 있게 됐다고 주장한다



18. 레고 _ 작게 쪼갤수록 무한 확장하는 상상력

     레고 블록으로 건축물을 쌓는 동안, 아이들은 “여럿이 모이면 달라진다 More is Different”라는 복잡계 과학의 핵심 메시지를 자연스레 배우게 된다. 

     세상에서 가장 창의적인 장난감은 ‘쓰레기 더미와 자연’이다. 잘 갖추어진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아이들보다 장난감이 하나도 없어 장난감을 ‘만들어서’ 노는 아이들이 실제로느 창의적이라는 연구 결과는 장난감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공한다 (실제로 가장 창조적인 사람들은 레고를 조립하며 노는 어린이가 아니라, 레고 회사에서 ‘장난감’을 만드는 기술자들이다)

     레고의 매력은 역시 원자론적 원리에 있다. 데모크리토스 원자론 (만물의 근원은 더 이상 쪼개지지 않는 입자로 구성되어 있다)은 매우 매력적인 학설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다양한 사물이 결국은 원자들의 상이한 배열의 결과라는 이야기. 이는 철학의 근본 문제에 대한 경제적이면서도 매우 미학적인 솔루션이다. 

     레고는 에코가 말한 ‘열린 예술 작품’이다. 플라스틱 모델의 조립은 결국 디자이너가 고안한 형태를 그대로 재연하는 데 그 본질이 있다. 조립에 들어갈 때부터 실현해야할 최종적 형태가 결정되어 있는 셈이다. 하지만 레고 블럭 앞에 앉은 아이는 아직 결정되지 않은 무한한 잠재성의 세계 앞에 앉아 있는 것이다. 레고 블록이 만들어낼 세계는 아이의 머릿속에 들어 있다. 아니, 머릿속에서 이제 막 자라나고 있다. 그것은 수많은 결단과 망설임을 동반하며 아이의 손끝에서 형성되어갈 것이다.



19. 위키피디아 _ 사이버 민주주의를 실험하다

문자 이전의 구술문학처럼 공동 작업의 산물

과거의 백과사전은 필자와 독자의 신분적 구별 위에 서 있었다. 이 관계에서는 유식한 지식인이 무식한 민중을 깨우치는 일방적 ‘계몽’만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위키피디아는 필자와 독자의 이 신분제를 무너뜨렸다. 거기서는 독자가 필자가 된다. 계몽주의가 민주주의 프로젝트의 일환이었고, 민주주의가 자기 자신을 다스리는 ‘자치’의 이념이라면, 위키피디아는 이 계몽주의가 목표로 삼았던 민주주의의 궁극적 완성이라 할 수 있다. 이제 민중은 스스로 가르치고, 스스로 배운다.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위키피디아의 성장은 전형적인 자기조직화 시스템 self-organized system의 발로다. 서로 쉽게 연결되고 모이면 새로운 형질이 창발되는 복잡계 시스템의 특징이 급속도로 성장하는 위키피디아를 탄생하게 만든 것이다.

컨설팅 전문가이자 <위키노믹스>의 저자 돈 탭스코트와 앤서니 윌리엄스는 기업들이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유능한 인재를 찾아내 난해한 문제에 새로운 아이디어를 구하는 혁명적인 시장에 주목했다. 그들은 이러한 시장을 ‘이데아고라 Ideagoras’라고 부른다. 고대 아테네 시민들의 정치 및 상업의 중심지였떤 아테네 시민광장 아고라처럼, 저자는 ‘이데아고라’가 과학기술의 중심이 되리라 믿고 있다.



20. 파울 클레 _ 예술의 경계가 무너지다

클레의 우주적 공간에는 리듬과 화음, 그리고 멜로디가 가장 기본적인 구성요소로 자리 잡고 있다.

우주의 구성입자와 그들 사이의 상호작용을 탐구하던 입자물리학자들은 상대성 이론의 거시적 연속성과 양자역학의 미시적 불연속성 사이에 존재하는 모순을 해결하고자 20세기말 ‘대담한 가설’ 하나를 세운다. 이 우주가 11차원 (혹은 26차원)으로 구성되어있으며 그 안에 담긴 물질은 ‘끈’ 모양의 기본 입자가 기타 줄처럼 진동하는 유형에 따라 고유한 성질을 나타낸다는 주장이다. 이 이론을 초끈 이론이라고 부르는데, 우주를 생성과 소멸의 과정으로 보는 빅뱅 이론과는 달리, 영원히 성장과 수축을 반복하는 세계로 파악한다. 불꽃놀이를 하듯 폭발하고 끊임없이 갈래가 져나가는 클레의 <우주적 구상>에는 수많은 초끈이 연주하는 ‘우주 교향곡’이 장중하게 연주되는 듯하다

“색은 영혼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는 힘이다. 색은 키보드이고, 눈은 망치이며, 영혼은 끈이 달린 피아노이다. 예술가는 연주하는 손으로 하나의 키 또는 다른 키를 두들겨서 영혼이 떨리게 만든다.” 칸딘스키

이 “공감각적인” 주제는 21세기 현대 예술에 가장 중요한 화두가 될 것이다. 화가들은 지난 5000년간 원근법을 이용해 2차원 캔버스에 3차원 공간을 표현하고자 노력했고, 사실적 묘사로 세상을 통째로 담아내려고 했으며, 빛이 주는 인상을 캔버스에 녹여내려 애썼다. 간단한 도형과 추상으로 세상의 본질을 화폭에 추스르려고도 했으며, 자연의 움직임이나 화가의 붓놀림으로 운동과 시간, 재질과 컨텍스트를 표현하고려고도 했다.

“나는 이 세상에서 이해될 수 없는 존재다. 내가 편안하게 머무는 곳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사람들과 죽은 사람들 사이에 있다. 대개의 경우 창조의 핵심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있지만, 아직 충분하다고 할 만큼은 아니다.” 파울 클레

클레에 따르면 예술에는 ‘근원적 시작’이 있다. ‘근원적 시작’이란 한마디로 창세를 말한다. 예술의 과제는 이 ‘창조 과정의 기적을 가시화해 체험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우주는 사물이 공존하는 상태가 아니라 거대한 생성과 소멸의 운동. 이 ‘사물 생성의 마법’을 클레는 미세한 움직임과 색의 미묘한 배치로 기록한다.

“예술은 가시적인 것을 재현하는 게 아니라, (비가시적인 것을) 가시화한다.” 이렇게 대상의 재현보다는 지각의 조직화를 지향하는 것이 현대 예술의 특징이다. 하지만 클레가 이 말을 했을 때, 거기에는 이런 일반적 의미를 넘어서는 또 다른 뜻이 숨어 있었다. 클레 자신의 말을 저 유명한 물리학 원리, 즉 알버트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와 연결한다. “지금은 가시적인 사물들의 상대성이 분명해졌다. 가시적인 것은 우주 전체에서 그저 고립된 예에 불과하다. (우주에는) 또 다른 진리가 엄청나게 많이 잠재되어 있다. 사물들은 더 넓고, 더 다양한 의미로 나타난다."

“여러 개의 독립적인 주제가 동시에 공존하는 현상은 음악에만 있는 게 아니다. 이는 모든 전형적인 사물들이 한 장소에서만 효력을 발휘하는게 아니라, 그 어느 곳이나 도처에 뿌리박고 유기적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한마디로 고전음악의 폴리포니(다성음악, 음악에 도입된 공간구조)는 음악에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라, 우주의 모든 것에서 발견되는 우주의 원리라는 것이다.

클레는 문자언어를 형상언어처럼 사용했다. 실제로 그는 관객에게 자신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문자나 기호, 텍스트를 소리내어 읽으라고 요청했다. 시각과 청각의 공감각으로 관객의 심리에 영향을 끼치려 했던 것이다. 이때 침묵의 장르에 속하는 그림은 음성회화, 즉 소리 나는 회화가 된다.

클레는 정신을 표현하려 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묘사해야 할 대상이 있었다. “대상은 세계였다. 물론 눈에 보이는 이 세계는 아니지만.” 그의 작업은 외부의 ‘재현’도 아니고, 내면의 ‘표현’도 아니었다. 클레는 자신을 영매로 생각했다. “작품은 저절로 발생한다. 그래픽은 열매처럼 무르익어 저절로 떨어진다. 나의 손은 내가 아닌 어떤 의지의 도구다."

클레는 어떤 유파에도 속하지 않았고, 스스로 유파를 창시하지도 않았다. 형식의 완전성에 집착하는 그의 태도가 어떤 눈에는 충분히 현대적이지 않게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미지와 텍스트의 결합으로 실재적인 것과 환상적인 것이 뒤섞인 잠재적 세계를 실현한다는 점에서, 클레는 이미 디지털 생성의 시대를 예고했다.




















'인사이트 >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책] TED 명사들의 추천도서 20  (0) 2015.01.26
[책] 정재승+진중권, 크로스 2  (0) 2015.01.26
[책]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0) 2014.04.14
[책] 계원 융합예술 필독도서  (0) 2014.04.09
[책] 작은 집을 권하다  (0) 2014.04.08